2024년 11월 24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미사 강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그분만이 오직 유일한 구세주이시며, 왕이시다. 그 왕은 이 세상의 왕들과는 전혀 다른 왕이다. 백성 위에 군림해서, 백성을 괴롭히는 것을 자신의 삶의 즐거움으로 여기는 그런 왕도 아니다. 고관대작들과 부자들의 말들에만 귀를 솔깃 세우고, 가난한 백성의 눈물과 한숨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는 왕도 아니다. 백성이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자기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어떻게 좀 해보라고 고관대작들을 꾸짖고, 백성에게 볼멘소리를 하는 그런 왕도 아니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에게 자기를 섬기라'가 아닌 ‘여기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잘하라’는, 다른 왕들은 흉내도 낼 수 없는 명령을 주신 왕이다.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신 왕이다. 인간적으로는 멀리 도망치고 싶은 고통의 길, 그러나 언제나 «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십자가의 길, 사랑의 길을 걸어가신 왕이다.
세상의 왕이 자기 중심으로 힘을 모을 때, 그리스도라는 왕은 힘을 버린 왕이었다. 세상의 왕은 좀 잘 나간다는 권력자들, 좀 많이 가졌다는 재벌들을 주변에 모으고, 재벌들이 죄를 지어도 경제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솜방망이 처벌을 해주거나, 사면을 해줄 때, 그리스도라는 왕은 가장 버림 받은 이들을 찾아간 왕이었다. 세상의 왕은 높고 힘 있고 잘난 길만 걸어갈 때, 레드 카펫이 깔린 길만을 주위 어떤 것에도 시선을 주지 않고, 도도하게 걸어갈 때, 그리스도라는 왕은 한 없이 낮게 또 낮게, 바닥을 기었다. 실패하고 저주받은 거친 광야의 길만을 걸어갔다. 그리스도라는 왕은 가장 가난하고, 가장 소외되고, 가장 버림받은 가장 작은 이들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 하셨다. 세상의 왕과 그리스도라는 왕의 결정적인 차이는 여기에 있다.
세상의 왕은 그 모든 것을 다 쥐려고 안간 힘을 다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행하였고, 세상이라는 감옥에 갇힌 삶을 살았다.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할 수 있었지만, 정작 아무 것도 지니지 못하였다. 자유롭지도 못했고 해방의 삶을 살지도 못했다. 도리어 자기 피붙이들끼리 서로가 죽고 죽이는 암투 속에 잠들어야 했고, 암살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는 왕은 달랐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며 우리의 왕이시다. 우리의 왕을 제쳐두고 다른 왕을 찾아 헤매는 것은 모반이다. 왕이신 예수의 자리에 권력이나, 돈이나, 명예나, 쾌락, 행복, 장수 등을 올려놓는 것은 모반이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왕은 우리의 이웃 안에서, 특히 가장 상처받기 쉬운 모습으로 현존하신다. 나에게 상처받은 그 사람 안에서 나의 그리스도 왕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내가 무시하고, 등을 돌리며, 애써 내 시선을 다른 곳을 향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 안에서 나의 그리스도 왕이 울고 계신다. 그 눈물을 닦아 드리고, 그 한숨을 함께 나누고, 그 아픔과 설움을 위로하기 위해 이제 우리 모두 함께 이 세상으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즐겨 사용하시는 표현을 빌리면, « 변두리 »로 뚜벅뚜벅 걸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 길이 비록 힘들고 험할지라도 변두리로 나가는 삶, 그 삶이 정녕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길이고, 흐트러진 우리의 마음을 다시 추스려, 그리스도왕좌 앞에 무릎을 꿇는 길이 아니겠는가 ?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도좌 권고 복음의 기쁨 49항을 인용하면서 강론을 끝맺고자 한다. : « 나는,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더 좋아합니다. 나는 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사로잡히고 마는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에서 위로와 빛을 받지 못하고 힘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을 뒷받침해줄 신앙 공동체도 없고, 삶의 의미와 목적도 없습니다. 우리가 길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우리에게 거짓 안도감을 주는 조직들 안에, 우리를 가혹한 심판관으로 만드는 규칙들 안에, 그리고 우리를 안심시키는 습관들 안에 갇혀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며 움직이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