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3일 연중 제31주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11월이 시작되고 3일이 지나고 있다. 한 해의 마무리를 이제부터 조금씩 하라고 자연은 우리에게 무언으로 가르친다. 그리고 교회는 11월을 위령성월로 정해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초대한다.
죽음을 잘 준비한다는 것, 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사는 것이다. 잘 살기 위한 방법은 두말하면 잔소리, 세말하면 입만 아픈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일까 ? 예수께서는 사랑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그 말씀들 가운데 중요한 두가지 말씀이 오늘 복음에 나온다. 첫째, 경천이고, 둘째 애인이다.
경천과 애인은 동등한 것이다. 경천이 위에 있고, 애인이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경천하는 것은 애인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애인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 « 남이 여러분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여러분도 남에게 해주시오 ». 먼저 남에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남이 먼저 나에게 해주면, 그만큼 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남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과 내가 남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다를 때에는 주님의 이 말씀을 주의해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렇다.
장자의 제물론에 조삼모사(朝三暮四) 이야기가 있다. 아침에 셋, 저녁에 넷, 우리는 조삼모사라는 말을 흔히 눈앞에 보이는 차이만 알고, 결과는 같은 것을 모르는 사람을 두고 사용한다. 이 조삼모사의 유래는 이러하다. 옛날 춘추시대 송나라에 저공이라는 사람이 원숭이를 많이 기르고 있었는데, 먹이가 부족하게 되자, 아침에는 도톨이를 3개, 저녁에는 4개를 준다고 하였다. 그런데, 원숭이들이 화를 냈다. 그러자, 그러면, 도톨이를 아침에는 4개, 저녁에는 3개를 주겠다라고 하자, 원숭이들이 기뻐하였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조삼모사라는 사자성어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절대로 어리석은 사람을 빗대어 하는 우화가 아니다. 이 이야기를 하나 하나 분석해 보면, 이 이야기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고, 나와 타인이 좋은 관계를 맺고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우화의 등장 인물들은 원숭이의 주인과 원숭이들이다. 원숭이가 제 아무리 사람 말을 잘 알아듣는다고 하더라도, 사람과 동등한 이성과 지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이 우화에는 원숭이의 주인과 원숭이들이 동등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주인이 원숭이에게 줄 도토리가 부족하게 되자, 주인은 원숭이들에게 물었다.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 그러자 원숭이들은 화를 냈다. 그러자, 주인은 원숭이들에게 그러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 그러자, 원숭이들이 기뻐하였다.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나,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나 하루에 원숭이들이 먹을 수 있는 도토리의 개수는 7개다. 사실 주인은 자기가 주고 싶은 대로 주면 그만일 것이다. 하루 분량이 7개라면, 아침에 2개, 저녁에 5개를 줘도 그만이고, 아침에 5개, 저녁에 2개를 줘도 그만일 것이다. 아니면, 아침에는 하나도 안주고, 저녁에 7개를 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침에 7개를 주고, 저녁에 하나도 안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원숭이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너희들이 원하는 것이냐고 말이다. 이 우화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여러 원숭이들을 기르고 있었다는 것, 그 원숭이들에게 먹이가 부족하게 되자, 자기 마음대로 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원숭이들에게 물었다는 것은 그 주인이 원숭이들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인과 원숭이들은 나와 타인이라는 관계를 대변한다. 그 관계 속에서 주인은 자기 마음대로 원숭이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원숭이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흔히 사랑이라고 하면,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 제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남이 여러분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여러분도 남에게 해주는 것 »이 사랑이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이는 조건이 붙어 있는 말이다.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사랑하려는 이들이 원하는 것이 동일할 때에만 이 말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사랑하려는 이가 원하는 것이 다를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를 때에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그에게 해주어야 할까?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는다. 때로는 사랑을 가장한 억압이 될 수도 있고, 폭력으로 변질되어 버릴 수도 있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원숭이들의 주인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준 것이 아니라, 원숭이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었다. 이것이 사랑이다. 나는 원하지 않지만, 사랑하고자 하는 이가 원하기에 하는 것, 이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아프다. 사랑은 힘들다. 사랑은 희생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나에게 이렇게 다가온다.
여러분에게 오늘 복음은 어떻게 다가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