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29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이스라엘에 있는 겨자나무는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의 큰 나무가 아니다. 커다란 떡갈나무나 한 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마련해주는 나무들만큼 크지 않다. 그 높이가 1미터에서 2미터 정도에 달하는 정도이다. 그 나무에도 물론 그늘은 있다. 그러나 큰 새들이 쉴 수 있을 만큼의 그늘이 아니다. 기껏해야 참새들이나 작은 새들이 날개를 거두고 잠시 쉴 수 있을 만큼의 공간밖에 되지 못한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시는 것일까?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한 것은 겨자씨와 겨자나무가 예수시대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친숙한 재료들로 말씀하시는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 바로 다름 아닌 하느님이 저 하늘에만 계시기 때문에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신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흔히 보고, 만질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가까이 계시는 분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이 겨자씨와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눈에 보일 듯 말듯 작은 겨자씨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그런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서 싹을 틔우고, 가지가 자라나서 한 그루의 나무가 된다. 이러한 겨자씨처럼, 하느님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이지만, 그러나 하느님은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일하시면서 어떤 일이든 이루어 내신다. 겨자씨가 자라나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쉴 곳인 그늘을 마련해주듯이(마르 4, 32 참조), 하느님도 사람들에게 ‘쉴 그늘’, ‘머물 그늘’이 되어 주시는 것이다. 바로 세상에 구원이 되시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라는 분이 겨자씨와도 같은 분, 누룩과도 같은 분이라고 천명하시지만, 그 비유의 말씀들이 나에게 와 닿는가? 만일 와 닿지 않는다면, 왜일까?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오늘 복음을 듣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자리가 농부들의 삶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고, 누룩을 빚어 빵을 만드는 제빵사의 삶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농부들의 삶, 제빵사들의 삶을 이해해 보려고 하고, 그들의 삶의 자리를 헤아려 보려는 노력, 곧 그들과 연대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오늘 복음이 그리 낯선 말씀으로만 남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겨자씨와 누룩을 통해 하느님을 알리고자 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잠시 헤아려 보자. 하느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려고 고심하는 하느님의 아들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으신가? 사랑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고민하고, 그들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어 가려고 노력하는 것, 연대하는 것,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늘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나는 예수의 마음을 엿본 것 같다. 그 마음이 내 안에서도 자라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녁을 보내고 싶다.
여러분은 오늘 저녁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