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본다는 것, 맑은 눈을 가진다는 것,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가려내는 눈을 가진다는 것, 그리 쉬운 일은 분명 아니다. 더불어 그런 눈을 가진다는 것보다 더더욱 어려운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고, 그 아는 것을 삶의 자리에서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나이가 많은 탓에, 혹은 나이가 적은 탓에, 혹은 배우지 못해서 가방끈이 짧은 탓에, 혹은 딸린 식구가 있는 탓에, 혹은 나 같이 미천한 것이 어떻게 감히 라는 식으로 자신을 업신여기는 탓에, 어려운 것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참으로 부지기수다. 그런 사람들을 두고 예수님을 알기 전의 바르티메오, 소경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치 제 운명인양 체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바로 눈 뜬 장님이라고 한다.
육체적인 눈은 떠 있지만, 감사의 눈이 닫혀 있고, 사랑과 용서의 눈이 감겨 있는 대신에, 눈에서 레이저가 뿜어져 나올 듯이 미움과 비난과 경멸의 눈은 시퍼렇게 떠 있는 사람, 볼 것, 못 볼 것, 봐야 할 것,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제대로 구별할 줄도 모른 채 살고 있는 사람들 또한 눈 뜬 장님이다.
오늘 복음에 보면, 바르티메오라는 소경이 길을 지나 가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목이 터질 정도로, «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라고 외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바르티메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조용히 하라고 하든 말든,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체면치레니 그런 것들을 다 내팽개치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으로 예수님께 « 제발 자기 좀 살려 달라 »고 울부짖었다. 소경으로 살아온 자신의 비참하기 짝이 없는 삶을 이제는 끝내고 싶어서, 바르티메오는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들에서 당신을 애타게 찾는 바르티메오의 절규를 들으셨고, 바르티메오의 결의에 찬 그런 행동을 결코 뿌리치지 않으셨다.
소경 바르티메오가 예수님을 부르면서 사용했던 « 다윗의 후손 »이라는 명칭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칭호였다. « 자비를 베풀어 달라 »는 말은 오직 하느님께만 드릴 수 있는 간청이었다. 그런데 이 하찮은 거지 소경인 바르티메오는 목놓아 이렇게 외쳤다. «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 그는 육신의 눈은 비록 소경이었지만, 세상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을 살릴 수 있다는 확신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하느님으로 볼 줄 아는 영적인 눈은 깨어 있었다.
드디어, 예수님은 당신을 알아 보는 사람을 만났고, 그에게 «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 »라고 물어 보셨다. 그러자 바르티메오는,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오게 마련이라는 성경의 말씀처럼, 자신이 간절하게 바래 왔던 소원을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씀드렸다 : « 다시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 바르티메오의 소원을 듣자 마자, 예수께서도 곧바로 « 가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살렸소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눈 뜬 장님으로 살고 싶은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꿈을 품었고, 희망을 가졌던 바르티메오처럼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눈 뜬 장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은근히 많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가 막무가내 밀어 부치기만 하면 될 것이라는 힘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고, 해보고 안되면 말고라는 식의 주먹구구식의 논리에 의해서 세상살이가 돌아가고, 부끄럽고, 불의했던 과거는 어떻게 해서든 구렁이 담 넘어 가듯, 넘기려고 하거나 오히려 왜곡하고, 날조하고, 조작해서 감추려고 하는 현실을 마주할 때에, 눈 뜬 장님으로 살면, 제 한 몸 편하게 살 수는 있다. 그러나 나 하나 편하자고 눈 뜬 장님으로 살아가다가는 나만 불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머지 않은 미래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젊디 젊은 사람들이 눈물과 한숨과 통곡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정녕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 거듭 나고, 또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 남으려면, 바르티메오의 « 주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소서 »라는 절규는 바로 우리 자신의 외침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님, 제발 저희의 눈을 다시 뜨게 해 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