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4일 금요일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교회사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교회가 권력과 결탁하고, 더 나아가 교회가 권력의 구조를 닮아가기 시작하면 그 교회는 반드시 부패하게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더 이상 세상을 향한 빛과 소금이기를 그만두게 될 때, 그리고 세상이 주는 단맛, 권력이 가져다 주는 그 싱그러운 맛에만 길들여지게 되면, 교회는 속화되기 마련이다. 그 교회에 속해 있는 사제는 속화된 교회 속에서 무늬만 사제로 살아 가도 괜찮다는 안일주의에 빠지기 마련이고, 교회의 교계 제도는 군림과 복종으로 점철되기 마련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 생명력을 상실하게 마련이다.
교회가 세상을 닮아 가려 하던 그 욕망이 극에 달했을 무렵, 교회의 역사 안에서는 언제나 쇄신의 목소리가 드높았다. 중세에는 대략 두 가지 형태의 종교‘개혁’이 존재한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Reformation)과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이탈리아 아시시 출신의 프란치스코의 종교쇄신이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같은 주님, 같은 하느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면서도 서로 등을 맞대고 있어야 하는 비극의 출발이 되어 버렸다. 교회 안의 문제를 교회 안에서의 정화와 쇄신으로 풀어내지 못하고 이를 교회 밖으로, 오직 성서(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s), 오직 은총(sola Gratia)이라는 또 다른 교리를 바탕으로 교회 밖으로 뛰쳐나간 것이 그 원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가톨릭 교회도 옹졸했다. 루터를 포용할 수 있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개신교, 천주교 라는 분열도 없었을 것이고, 개신교, 천주교 간의 반목이 이렇게까지 깊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루터의 개혁에 비견되는 또 하나의 개혁이 있다. 바로 프란치스코의 쇄신이다. 루터가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작했다면, 그래서 교회를 뛰쳐나가 또 하나의 교회를 세웠다면 프란치스코는 철저히 아래로의 개혁을 진행시킨 인물이다.
프란치스코 역시 당시 교회의 수많은 문제들을 알고 있었다. 교회가 얼마나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려 하는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높이려 하고 성취하려 하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교라는 이름으로 다른 민족들을 위협하고 있는지, 프란치스코 본인이 십자군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이었기 때문에, 교회가 걸어가고 있던 길이 결코 복음적이지 않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철저히 자기 자신부터의 개혁을 시작했다. 자기 자신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낮추며 죽이기 시작했다. 완전히 버려 십자가의 예수께서 알몸으로 매달리셨던 그 모습에서부터 시작했다. 거적데기 한 장 걸치고 쓰러져가던 성당들을 다시 일으켜 내자 죽었던 복음이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생명을 잃었던 교회가 다시 꿈틀거리게 되었다. 희망을 잃었던 사람들이 다시 교회를 통해 희망을 살게 된 것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이 모든 것들을 철저히 교회 안에서 진행시켰다. 교회 교도권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에 앞장선 모범을 보였다. 복음 앞에서는 가장 복음적인 것이 가장 강력한 위력을 지니게 되고, 그리스도 앞에서는 가장 그리스도적인 것이 가장 힘 있는 것이 되며, 교회 앞에서는 가장 교회적인 것이 가장 위대한 일이 된다는 사실을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삶으로, 자신의 몸뚱아리로 온전히 다 보여주었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시대의 아픔 속에서, 시대의 방황 속에서, 교회마저도 이리 저리 흔들리고 있다. 정부의 방침과 정책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위배될 때에, 그리스도냐? 아니면 국가냐? 를 선택해야 할 기로에 놓여 있다. “나라가 있고 나서, 교회가 있는 것 아니냐!!! 너는 대한민국 사람 아니냐!!! 왜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그 따위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이냐? 너도 종북이냐? 왜 부강한 국가라는 비전을 훼방하고 있느냐?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는데, 무슨 자연 보호냐? 국가 기간 산업을 망치려는 것이냐? 너도 빨갱이냐? ” 라고 말하는 이들이 교회 안에서도 하나의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갈등의 시대에 프란치스코 성인이 참으로 그립다. 오늘은 진흙탕 같은 시대와 자기 자신과의 투쟁 속에서 우러난 기도, 평화의 기도가 절로 읊어지는 날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읊어 드리며 오늘 강론을 끝맺겠다.
평화를 구하는 기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게 하소서.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오 주님, 저로 하여금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고,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림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