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7일 금요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한국인들에게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 같고, 한국인들의 심성 저 깊숙이까지 촉촉히 적셔주지는 못하는 종교로 남아 있다. 많은 신자들에게는 아직도 복음보다는 불교의 가르침, 공자의 가르침이 더 쉽게 이해되고, 더 많이 마음에 와 닿고, 더 가까운 친근한 것이 이 땅의 현실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어설프고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고 왠지 급조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게다가, 많은 신자들이 예수를 주님이요 구세주라고 고백하기는 하지만, 실제 생활 속의 주님은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재물이 주님이요, 권력이, 명예가 혹은 나의 남편이, 나의 아내가, 나의 애인이 혹은 나의 자녀가 주님인 경우가 다반사요, 나의 취미가 주님이요, 나 자신이 구세주인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그리고, 주인 주主자 대신에 술 주酒를 써서 주님인 경우도 허다하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제자들은 « 세례자 요한, 엘리야, 혹은 옛 예언자 한 분 »이라고 대답한다. 군중들의 의식 속에는 이미 구약 성경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만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물었다면 누구라고 대답했을까? 석가모니, 공자, 단군, 위대한 성현 중에 한 분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베드로가 « 스승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했을 때, 그리스도란 구세주라는 뜻이다. 사실 이 문장은 엄청난 고백이다. 나를 구원해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라는 그분밖에 없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에는 ‘당신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당신만이 나를 구원해주실 수 있으신 분, 그래서 당신은 나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분이십니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군중들에게 있어서 예수라는 분은 절대적인 분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중에 한 분일 뿐이었다. 그분이 세례자 요한이든, 엘리야이든, 옛 예언자 중에 한 분이든, 군중들에게 예수는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이었다. 예수라는 분이 군중들에게는 절대적인 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분을 절실하게 믿을 필요도 없고, 구세주라고까지 고백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에는 올리브 가지를 꺾어 예수를 환대했고, 레드 카펫까지는 아니지만, 나귀가 지나가는 길 앞에 자신들의 옷을 벗어 예수를 융숭하게 맞이했지만, 정작 그 예수가 본시오 빌라도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는 « 유대인의 왕 »이라는 죄목의 정치사범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당하도록 예수를 쓰레기 버리듯, 그렇게 내쳐 버렸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은 참으로 중요한 질문이고, 그분에 대한 나의 신앙 고백은 나의 삶을 결정짓게 하는 것이다. ‘과연 나에게 있어서 구세주는 누구인가?’ ‘정녕 예수라는 분이 나의 구세주인가?’ « 그렇다 » 라는 대답은 정말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 그렇다 »라는 대답은 늘 새롭게 해야 한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하는 가전제품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내 일생을 걸고, 내 삶의 매 순간 순간마다 새롭게 쇄신되어야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