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2일 한국 순교자들 대축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초대 한국 교회사를 공부하다 보면, 신약성경의 사도행전과 바오로 사도의 여러 서간에서 얼핏 얼핏 드러나는 초대교회의 모습과 초대 한국 교회의 모습이 참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초대교회는 그 구성원들끼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사도 2,42-45 참조). 초대 교회 안에는 왕도 귀족도 노예도 종도 없었고, 오직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만 존재했었다(갈라 5, 13 참조). 초대 한국 교회 역시 그러했다. 영세 받은 사람들끼리는 왕후장상과 양반 상놈이 없었다. 저 지체 높으신 양반님네들도 최하층 사람들에게 하대가 아닌 존대를 했었고, 이름조차 없던 개똥이, 소똥이도 요셉 형제, 마리아 자매라고 불렸다.
사람 취급 받지 못하고 개, 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던 이들이 양반님네들과 겸상을 했고, 그들과 함께 대화도 나누었다. 양반님네들도 유교와 유학이 추구했던 세상, 모든 사람이 존중 받는 세상을 경험했다. 사농공상과 신분제도를 국법으로 여기던 조선시대에 영세 받고 신자가 되는 것 자체가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행복이었다. 거기에다 천주님을 믿다가 죽으면 하느님 나라로 가서 영복을 누린다는 교리까지 받았다.
초대 한국 교회의 신자들은 양반 쌍놈이 없는 세상, 모두가 평등한 세상, 곧 지상에서 하늘 나라를 이미 살고 있었다. 그들은 천주교인이라고 붙잡혀 투옥되고 모진 고문을 당했을 때에도, 천주님을 믿고 죽으면 영복을 받으니까, 지금 겪는 힘듦을 조금만 참아내면, 영원한 복락을 누릴 것이라고 믿었다. 바로 그 믿음이 그들을 그렇게 용감한 순교자가 되게 했던 것이다.
순교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고, 그들의 순교장소를 성지로 조성하는 데에 수 억 원이 넘는 돈과 열정과 기도를 바치지만, 지금의 우리들의 삶 속에서의 순교를 꺼린다면, 오늘날의 불의에 저항하지 않고서 지난날의 순교자를 추앙하기만 한다면, 법으로는 계급제도가 없어졌다지만, 여전히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권력에 얼마나 가까이 가 있느냐에 따라서,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 정규직이라도 수퍼갑이냐 그저 그런 갑이냐에 따라서, 계급이 존재하는 이 현실 속에서 평등을 외치지 않고, 차별 철폐를 외치지 않고, 그저 침묵하거나 무관심한다면, 순교 성지 순례나 순교자 찬양은 그저 순교 마케팅에 불과하다. 오늘날의 우리가 순교의 삶을 살아야 과거의 순교자들을 제대로 존중하는 것이고, 과거의 순교자들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 걸어 갔던 그 길을 영광으로 알고, 자랑으로 여기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그분들의 삶을 본받고, 바로 지금 여기에서, 그분들의 삶을 우리도 살아내 보겠다고 어금니를 깨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다짐하면서 그 다짐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내 삶의 자리에로 옮기려 애쓰는 것, « 순교자 믿음 본받아 끝까지 충성하리라 »는 이 노래를 바로 지금 온몸으로 노래하려고 애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