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1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 가난한 사람들,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 진짜로 그러한가 ? 가난한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보면, 독하다. 돈이 되는 것이라면, 그 일이 무엇이든 간에 목을 매고 달려 드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상상하고, 우리가 그려내는 하느님은 참으로 너그러우신 아빠, 아버지, 잘못을 범했을 때에, 그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면 용서해 주는 넉넉한 분이신데,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넉넉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산다. 가난한 사람들은 지지리도 궁상맞게 살아가고, 세상에 대해서 독기를 품고 사는 이들이 더 많다.
하느님의 아들은 양다리를 걸치지 말라고 하셨지만, 한 손에는 맘몬을, 다른 한 손에는 신앙을 쥐고 있으면, 꽤 그럴 싸 해 보이는 삶을 영유할 수 있는 것 같은 세상이다. 가진 자가 더 인격적으로 고매한 것처럼 보이고, 가진 자가 더 위대한 것처럼 보이고, 더 능력 있는 자처럼 보이는 세상이다. ‘하느님의 축복=돈’이라는 이 말도 안 되는 등식은 우리 시대에 마치 진리처럼 여겨진다.
우리 시대뿐만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인이었다. 그들은 남보다 더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교회에서마저 소외되어 대접받지 못하고 밀려난 사람으로 취급 당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치이고, 저렇게 치여서 가난한 사람들은 독하다. 하지만 그들을 그렇게 독한 삶으로 내 몬 것은 세상의 논리와, 소위 세상의 있는 것들이지, 하느님이 아니다. 그들을 죄인 취급하고, 그들을 소외시키고 버리는 것은 돈이 최고인 세상이지, 하느님이 아니다.
마태오 복음에 보면, « 가난한 사람들 »이라는 글자 앞에 « 마음 »이라는 것이 덧붙여져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은 다른 사람일까? 그렇지 않다. 가난한 사람이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나 둘 다 똑 같은 가난한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그 마음 또한 가난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을 두고 겸손한 사람이라느니, 그 따위로 설명하려는 것 자체가 가진 자들의 발상이고, 먹고 사는 데, 그리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의 발상이다.
가난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이들을 두고, 그 상황을 무시하고, 율법 제대로 지켜라, 이 암아하렛츠들아!!! (땅버러지들아!!!)라고 낙인을 찍어버렸던 예수 시대 당시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항하고, 저항했던 선언이 바로 « 가난한 사람들(혹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하느님이 여러분 것입니다. 하느님이 여러분 편입니다 »이다. « 마음이 가난한 사람, 가난한 사람, 당신들은 죄인이 아니오. 하느님이 여러분 편이신데, 어찌 여러분이 죄인이겠소? »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진복팔단의 첫번째 선언, 그것은 바로 혁명 구호였던 것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께서 참행복 선언에서 제시하는 역설들은 신앙인들이 이 세상에서 처해 있는 진짜 상황을 표현한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실제로 걷는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 의지로, 가난하게 되는 것이고, 굶주리게 되는 것이고, 울게 되는 것이고, 미움과 박해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참행복, 진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얼핏 참 행복 선언은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에 반대되는 것들에 대한 선언처럼 들린다. 하지만, 참 행복 선언은 우리들에게 ‘회개’를 요구한다. 본능적으로 소유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구에서 등을 돌릴 것을 요구한다. 적어도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에게 그 요구는 당연시되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로, 참 행복 선언에 나오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모습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참 행복 선언의 배후에는 그리스도께서 당당하게 앉아 계신다(마태 5,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