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30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사람이 살아가는 중에 맞이하는 때가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태어날 때, 혼인할 때, 죽을 때가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그 때가 우리 사람들의 삶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순간은 사람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고, 죽음의 순간에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삶으로 옮겨가고, 혼인할 때에는 두 사람이 결합하여 하나로 태어나는 새 삶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혼인의 순간에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지 못한다면, 그 맞이함이 소홀하다면, 그 신부의 삶 전체가 실패로 연결되지 않겠느냐는 물음과 함께, 마지막 때도 그러하니 이 세상의 삶 전체가 실패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으라"는 가르침이 오늘 복음의 핵심이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혼인 잔치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 이야기를 통해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마지막 때를 준비하라는 깨우침을 준다. 팔레스티나 지방의 혼인 풍습은 마을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그 절정은 신랑이 신부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다. 신랑의 도착이 알려지면 들러리 처녀들이 신랑에게 마중 나가 신부의 집으로 안내한다. 그 다음에 모든 이가 신랑의 집으로 가서 성대한 혼인 잔치를 벌인다.
4복음서들 중에서 오직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 이 ‘열 처녀의 비유' 이야기에서는, 다섯 명의 슬기로운 처녀들과 다섯 명의 미련한 처녀들의 행동이 대조적으로 비교되고 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어느 때 올지 모르기 때문에, 오랫동안 등불을 켜놓을 수 있도록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다, 반면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갖고 있었으나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다. 막상 등불이 꺼져갈 때에도 남에게 빌릴 생각만 하였지, 가게에 가서 살 생각은 못하였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이 모두에게 부족할지 모른다는, 그래서 잔치 안내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부족한 것은 가게에 가서 사 쓰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차이점은 적어도 겉모습으로는 없었다, 모두 같이 곱게 단장하고 같이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점은 기름의 준비였고, 부족한 것을 어떻게 챙기느냐는 것이었다. 슬기로운 사람은 내일, 곧 미래를 준비한다. 어제와 오늘을 연결시키고 또 오늘을 내일과 연결시키며 준비한다. 그렇게 “내일이 있다"고 내일을 위해서 준비한다. 미련한 사람은 오늘만을 산다.
우리 인생은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혼인에 비길 수 있다. 그러나 그 신랑이 도착하리라는 사실만 알 뿐 그 정확한 시간은 모른다, ‘이미' 와있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대에서 ‘신랑이신 주님’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내일이 있으니까 오늘은 뭐 대충 그냥 지내지 뭐”하는 유혹에 넘어 가지 말고, ‘늘 깨어 있는’자세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 때가 오면 “빌리면 된다", “사면 된다", “내일이 있다"는 식의 게으름과 미련은 통용될 수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마지막 때라는 것이 먼 미래의 세상의 종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열처녀에 대한 비유 이야기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현재에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은 미래에 불행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일, 바로 경천애인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과 함께 사는 슬기로운 사람이 되자는 이야기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이라는 잔치를 이미 주셨다. 우리도 이웃에게 잔치와 같은 기쁨이 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나 싶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멀리 있지도 않고 험난한 고행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하느님을 우러러 세상과 이웃을 보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을 확산시키는 데에 하느님의 뜻이 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이고, 죽음의 휘장을 넘어서도 하느님에게로 가는 길이다. 오늘 복음은 나에게 경천애인의 자리가 지금 여기임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여러분에게 오늘 복음은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