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고 하지만, 성경을 진지하게 마주하려는 사람들에게 성경이 증언하는 복음의 내용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불편하게 하는 소식으로,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어떻게든 무언가를 하라는 명령의 말씀으로 다가올 때가 더 많다. 오늘 독서와 복음들도 그러하다. 제1독서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라고 일갈한다.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 아모리족의 신들, 그 신들은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허상들이다. 소위 좋은 말만 하는 신들, 마치 힘겨운 삶의 고통을 견디어 내게 하는 용기와 힘을 주는 신이 아니라, 고통을 잊게 하는 모르핀이나, 아편을 주는 짜가 신이다. 혹은 하느님의 말씀들 중에서 적당히 자기에게 이로운 것만을 골라서 믿으려고 하는 약삭빠른 자들이 믿는 가짜 신이다.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라는 여호수아의 서슬 퍼런 말이 그저 3800년 전의 사람들에게만 한 말은 아니다. 오늘의 우리들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 내 말이 귀에 거슬립니까 ? », « 당신들도 떠나고 싶습니까 ? »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결국 « 당신들은 정녕 끝까지 나와 함께 하겠습니까? » 라는 물음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어중이 떠중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떠났다. 그들이 예수님을 떠난 것은 예수의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감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자기네 삶에 도움이 될 만한 물질적인 무언가를 바랬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욕망과 그들의 기대를 채워주지 않았다.
베드로도 될 수 있고, 유다도 될 수 있는 우리다. 큰소리 떵떵 쳐놓고, 실제로는 뒷꽁무니로 빠져버린 베드로, 기대와 희망을 저버렸다고, 눈길 돌리고, 마음 접어버리며 급기야 사랑했던 사람마저도 배신하고, 그를 죽음의 길로 내쳐버리는 유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관심도 없이 그저 방관자로만 머물러 있다가 자기에게 손해가 끼칠 징조가 보이면, 언제라도 도망가 버리는 나머지 제자들, 그들의 모습들이 바로 우리들의 내면에 있는 우리들의 또다른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셨을 때, 그 십자가 아래를 지키던 이들은 똑똑하고, 빠릿빠릿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큰소리 뻥뻥 쳐대던 사람들도 아니었다. 어중이 떠중이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은 겸손한 이들이었다. 예수의 어머니와 또 다른 마리아, 그리고 예수의 사랑 받던 제자뿐이었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타임머신이라는 게 있어서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십자가 길을 걸으실 때, 내가 만약 거기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다면, 나는 어디에 있을까 ? 예수를 조롱하던 로마 군인들 틈에 ? 예수에게 침을 뱉고, 욕하고 손가락질하던 군중 틈에 ? 십자가를 지고 가던 피 흘리는 예수를 보며 눈물 짓는 여인들 틈에 ? 예수의 얼굴을 닦아주던 베로니카 옆에 ? 예수와 함께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던 그 겸손한 이들 옆에 ? 나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 분명한 것은 « 내 말이 귀에 거슬립니까 ? » 이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십자가의 길 위에서 내가 서있는 자리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정녕 오늘 독서와 복음은 나에게 크나큰 도전으로 다가온다.
여러분에게 오늘 독서와 복음은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