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그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다.”
손숙경 프란치스카 로마나
온천성당 · 전 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
1928년 3월 3일 언양(현 울산시 울주군) 지역 16개 공소의 회원 대표 20명이 참석하여 ‘언양지방천주공교협회(彦陽地方天主公敎協會)’를 조직하여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언양 본당의 평신도들이 교회 운영 보조와 성전건립을 위하여 결성하였는데, 부산진 본당에서 분리된 이후 교회의 자립과 전교 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조성하고자 함이었다. 또한 당시 한국천주교회가 외국 교회와 단체들의 재정적 도움에 대해 이제는 자립하고자 한 것이다.
협회는 당시 언양 본당이 관할하던 지역의 공소들을 포함하였고, 임원은 각 공소의 회장들이다. 중요한 역할은 이 시기 천주교회가 시행하는 가톨릭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재정기반인 공소전(公所錢) 운영이었다. 공소전은 각 공소와 성당보좌금 등 교회의 전반적인 운영에 사용되었다.
이 같은 조직의 존재와 역할은 천주교 수용 초기부터 이어져 온 언양 지역 천주교 신앙공동체의 역사적 유산이 바탕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평신도 지도자들이 공소들을 하나로 묶는 공교협회를 조직한 것은 태평양전쟁기, 해방과 미군정기의 격동기 속에서 천주교회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협회의 역할과 활동에 대한 기록물을 보면서 문득 영국의 유명한 낭만파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1788~1824)의 일화가 떠오른다. 그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수학할 때 종교학 시험에서의 이야기이다. 시험 문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의 기적을 신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바이런은 두 시간 내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시험 종료 직전 “물이 그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다.”라는 한 문장을 적었고 최고학점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천주교에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던 박해시기와는 다르지만 식민지기 평신도들은 협회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변화된 포도주로서, 교회의 재정자립과 전교로 교세를 확장해 나가는 등 그들의 사명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외국 선교사의 도움 없이 평신도를 중심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교회공동체가 형성된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적 모습을 상기시켜 볼 때, 평신도로서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가져도 충분히 좋을 것이다.
스스로 길을 만들어 가는 폭포처럼 한 사람 한 사람 평신도의 사명과 역할이 바로 붉은 포도주로 변해가는 주인공일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