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2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세상이나, 2천년 전 예수님의 세상이나 세상은 참으로 무서운 곳이다. 힘의 논리, 약육강식의 논리가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다. 이러한 세상 한가운데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양떼를 이리떼 한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오늘 복음은 한 더위의 시원한 팥빙수 같은 것도 아니요, 달콤한 초코파이 같은 것도 아니다. 참으로 듣기가 힘든 말씀들이다. 특히나,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높은 산 하나를 만나게 한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라 살면, 지배자들과 권력, 국가 기관에 잡혀 가서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고, 가족 안에서조차도 지지와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고, 부모 형제들과의 갈등이 뒤따를 것이고, 마을 등 지역공동체에서조차도 배척을 받고, 축출 당한다 한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고통의 길, 죽음의 길이라 한다.
게다가 당신 제자들을 이리떼 한가운데로 보낸다는 말씀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자식놈을, 제자들을, 추종자들을 사지로 몰아 넣는 듯한 말씀, 참으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이리떼 한가운데로 파견한다는 것은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이리떼에게 물리도록, 상처 입도록, 피가 철철 흘러 넘치도록, 물려 죽도록, 죽음의 한 가운데로 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으로의 파견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그런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그런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아니라고 목놓아 외치고, 그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고, 뒤집어져야 한다고, 세상이 뒤집어진 것처럼, 더 이상 약육강식의 논리에, 힘의 논리에 따라 살지 아니하고,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껴 주고, 서로 상처를 닦아주고, 싸매 주며 사는 것이라고 알려 주신다.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를 모른다고 하는 것이고, 그러면, 예수께서도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 앞에서 그를 두고 모른다고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신앙인으로 살아 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제 한 몸만 편하자고, 제 가족만 복 받자고 성당에 나오는 것이 아닌 이상,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이 주는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지는 것이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 힘듦의 한가운데에 하느님이 계신다. 참새 한 마리조차도 쉬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참새를 귀이 여기는 하느님이 계신다. 우리들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시는 하느님이 계신다.
세상 사람들은 시비를 걸듯이 묻는다. 도대체 하느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있으면, 보여 달라고. 그러나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자기네들 눈으로 보고서도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한 것과 똑같이 말이다.
나 아닌, 너를 위해, 너의 참 행복을 위해 사는 삶, 억울한 일을 당해서 땅을 치고 통곡하는 이의 옆으로 다가가, 네 잘못이 아니라고, 두 손 꼬옥 잡아 주는 거기에, 그 억울함의 원인이 세상의 모순에 있으니, 그 모순 한번 같이 깨뜨려 보자고 세상에 도전장을 내미는 거기에, 불평등한 이 세상, 다 망해 버려라고 악다구니를 퍼붓는 이의 옆으로 다가가 불평등한 현실을 바로 잡으면, 이 세상 그래도 살만하다고 용기 내어 살아 보자고 두 손 꼬옥 잡아 주는 거기에 하느님이 계신다. 성당 안에만, 예배당 안에만 하느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아파하고, 이리떼 같은 이 세상에서 힘들어 하고, 울고, 통곡하는 이들의 한 가운데에 하느님이 계신다.
그 하느님 만나러 가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