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자기가 만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어느 집안 출신이냐에 따라, 그리고 자기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딘가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정해지기는 한다. 그러나 그 눈은 대부분 우물 안 개구리의 눈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가 우물 안 개구리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 사람,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참으로 귀한 것 같다.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권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고, 돈을 추구하는 사람은 돈되는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사람 괴롭히는걸 취미로 삼고 그걸 구하는 사람은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곧잘 괴롭힘의 대상을 물색한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의 행동을 보고 저 인간은 마귀들의 대장인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저런다고 말한다. 개 눈에는 똥 밖에 안보이듯이 자기네들의 눈에는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율법의 지배를 벗어나 있는 이들, 눈이 맑은 이들은 예수를 보고 경탄해 한다. 단순하고, 순수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이고, 있는 그대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예수의 행동이 축복이요, 은총이었다. 그러나 자기들 스스로 교만한 사람들, 하느님을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 자기 스스로 올바르게 산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행동은 신성모독으로 내비쳤다.
이런 일이 비록 2천년 전에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이 땅에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신부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고 하기 보다는 젊은 사람들 젊은 여자들을 더 좋아하면 욕을 얻어먹는다. “저 인간들 신학교에서 뭐 배웠노?, 저게 신부 맞냐?” 하면서 말이다. 신부가 하느님의 일을 조금은 게을리 하고, 대신에 세상의 것 돈이나 명예나 권력을 추구해도 그 신부는 욕을 얻어먹는다. “자기 자리를 알아야지” 하면서 말이다. 겉으로는 “아이고 우리 신부님! 우리 신부님은 힘도 좋으시네요! 우리 신부님은 이런 저런 사람도 잘 아시네요!” 하면서 부러워하는 눈길을 보내는 척 하지만 그러나 그런 신부들을 보며 세상은 욕한다.
신부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해, 후원회를 만들고, 오순절 평화의 마을이나, 꽃동네 같은 그럴싸한 곳을 만들면, 그 신부는 사람들로부터 칭찬도 받고, 나라로부터 표창도 받고, 훈장도 받는다. 그런데, 그 가난과 소외와 힘없음의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다름아닌 사회 제도 자체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고, 그 사회 제도 자체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힘없는 이들과 함께 연대하고 그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려고 하면 이 나라에서는 욕을 얻어먹는다. 별나다고, 또는 빨갱이라고 말이다. 마치 오늘 복음의 예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저 짓거리를 한다고 욕을 얻어먹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인” 백성들이 사방 팔방이 막혀서 하늘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것에 어찌 가엾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 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힘이 들게 살아가면서도, ‘사는 게 뭐 이런 것이지, 별 수 있나?’라고 한숨 쉴 때에는 눈물이 핑 돌기까지 하고, 백성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 눈을 흘겨 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오늘 복음의 주님의 말씀에 충실해야지 하며 다시 마음을 다잡아 본다. « 빨갱이 », «별난 신부 »라는 그런 욕을 얻어 먹는 신부들이 이 나라 이 땅에 참 많았으면 좋겠다고,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듯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해 본다. 이런 나의 바램이 한낯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2천년 전 예수께서 사셨던 거기와 다를 바가 별로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나에게 이렇게 기도하라 한다.
여러분에게 오늘 복음은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