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0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진복팔단이라고 알려진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구절이다. 루카 복음에도 진복팔단이 나온다. 그런데, 첫문장이 다르다. 오늘 복음에는 행복한 사람의 첫 번째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루카 복음에는 행복한 사람의 첫 번째가 가난한 사람이다.
오늘 복음인 마태오 복음에서는 « 가난한 사람들 » 앞에 « 마음 »이라는 단어가 덧붙여져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은 다른 사람일까? 가난한 사람이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나 둘 다 똑 같은 가난한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그 마음 또한 가난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을 두고 겸손한 사람이라느니, 그 따위로 설명하려는 것 자체가 가진 자들의 발상이고, 먹고 사는 데, 그리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의 발상이다.
예수님 시대에 가난한 사람은 죄인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가 없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가난해서, 안식일을 지켰다가는 하루 종일 굶어야 했을 것이고, 가난해서 제대로 배우지를 못했으니, 글자도 못 읽었을 테고, 그러니 율법이 뭔지도 몰랐다.
누군가를 죄인 취급하면, 처음에는 나는 죄인 아니다고 그럴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또, 전문가들이 그렇게 얘기하면? ‘내가 진짜 죄인인가?’하고 의문을 품게 된다. 그렇게 의문을 품고 있는데, 몇 날 며칠이 아니라,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렇게 말한다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다는 것 자체로 죄인이 되어 버린다. 우리나라도 지금 이런 상황이지 않은가? 가난이 죄가 되는 나라말이다.
가난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이들을 두고, 그 상황을 무시하고, 율법 제대로 지켜라, 이 암아하렛츠들아!!! (땅버러지들아!!!)라고 낙인을 찍어버렸던 예수 시대 당시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항하고, 저항했던 선언이 바로 «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혹은 가난한 사람들),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하느님이 여러분 것입니다. 하느님이 여러분 편입니다 »이다. 이 선언은 « 마음이 가난한 사람, 가난한 사람, 당신들은 죄인이 아니오. 하느님이 여러분 편이신데, 어찌 여러분이 죄인이겠소? »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진복팔단의 첫번째 선언, 그것은 바로 혁명 구호였던 것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의 역설들은 신앙인들이 이 세상에서 처해 있는 진짜 상황을 표현한다. 하느님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실제로 걷는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 의지로, 가난하게 되는 것이고, 굶주리게 되는 것이고, 울게 되는 것이고, 미움과 박해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참 행복, 진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얼핏 오늘 복음은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에 반대되는 것들에 대한 선언처럼 들린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결국 ‘회개’를 요구한다. 본능적으로 소유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구에서 등을 돌릴 것을 요구한다. 적어도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에게 그 요구는 당연시되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로, 참 행복 선언에 나오는 사람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모습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참 행복 선언의 배후에는 그리스도께서 당당하게 앉아 계신다(마태 5,1 참조). 오늘 복음은 나에게 이렇게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체와 그분을 따르는 이들의 정체를 알려준다.
여러분에게 오늘 복음은 어떻게 다가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