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6일 삼위일체 대축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성경에는 아버지·아들·영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하지만, 성경 어느 곳에도 « 삼위일체 »라는 용어는 눈 씻고 찾아 봐도 없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2세기 경, 떼르뚤리아누스라는 교부께서 맨 처음 사용하셨다. 신·구약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하느님이 아버지, 아들, 영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그 하느님이, 세 분의 하느님들이 아니라,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낱말이 바로 삼위일체라는 단어다.
하느님은 구원의 역사 속에서 아버지, 아들, 영으로 드러내셨다. 그리고, 그 본 모습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시다’라는 말은 결국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창조하신 이 세상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의 기쁨, 슬픔, 고통, 아픔 등을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고통과 아픔을 나누고자 하시는 하느님,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바로 임마누엘 하느님이다. 이 임마누엘 하느님이 삼위일체 하느님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그냥 우뚝 선 높은 분이 아니다. 규율을 따지고 무서운 심판을 하시는 분이 아니다. 외로이 멀리 떨어져 옥좌에 홀로 앉아 인간 생활을 관할하고 통제하시는 고독한 분도 아니다. 하느님은 어디까지나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스스로가 공동체를 이루고 계시고, 스스로가 친교와 사랑으로 맺어져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아무런 굴레 없이 처음도 마지막도 없이 사랑으로 친교로 맺어진 한 분 하느님, 한 공동체 하느님이다. 이렇게 사랑과 공동체의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은 죄지은 자녀들을 보고 마음이 아파 어쩔 줄 몰라 하시고, 당신께 무관심한 사람들이 마음을 열어주기를 한없이 기다리시며,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울음을 터뜨리며 고난 받으시는 연약하디 연약한 여리디 여린 분이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삶의 방식을 선명히 보여준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 존재의 모든 신비를 밝혀 주시는 분, 인간 존재의 신비의 근원이신 분이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인간 존재가 무엇인지, 그 신비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말이기도 하다. 곧, 하느님이 사랑일진대, 사랑이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밝혀 내는 신비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다. 사랑은 내가 사람이게끔 만들어 주고 또 사람으로 살아가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아는 것은 많은데 실천이 거의 없는 세상이다. 머리로 생각만하고 마음은 움직이지도 않거나, 설사 마음은 먹더라도, 백날 마음만 먹다가 끝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세상이다. 이 모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살고 있는 신자들 탓이 크다.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은 어려운 교리를 우리가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보다는 오히려 내가 얼마나 이 세상을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으며 살고 있는가를 곰곰히 되짚어 보는 날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닮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머리와 가슴과 손발이 하나로 움직여 산다는 것이다. 생각한 것을 가슴에 품고 그 품은 뜻을 손발로 실천할 때, 나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처럼 사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도 늘 성호경을 그을 때마다, « 하느님, 내 머리와 이 가슴이 하나가 되게 하시고, 또 내 가슴과 이 두 어깨가 또한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제대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으며 살아 가고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 믿는 시늉만 하며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