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초대 교회 공동체는 세상으로부터 ‘왕따’당한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그들이 가졌던 가치는 세상의 가치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2천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변함없이 세상은 똑똑하고, 잘 살고, 힘 있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판을 치는 곳인데 반해, 초대 교회 공동체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이기기보다는 져주고, 가지기 보다는 내놓고,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살기보다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마음을 살피고, 헤아리는 삶을 살아야 했으니, 이러한 삶은 스승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과 같은 것이었다. 그 길은 고통의 길과 같은 것이었고, 오늘 복음의 표현을 빌면, 마치 산모가 아기를 낳을 때의 산고와도 같은 길이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본다면, 고통은 피하고 싶은 것이다. 고통을 기쁨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약 먹은 사람이거나, 고통을 즐기는 피학성 변태 성욕자나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 같은 부류일 것이다. 그런데, 그 길을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기쁨이라고 말씀하신다. 왜일까 ?
사랑하는 사람은 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이 고통을 당할 때, 자기 희생을 치러야 할 때, 그 고통과 희생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말이다. 사랑은 달콤하고, 엄마처럼 다정하고, 포근하고, 잠처럼 편하고, 꿈처럼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때로는 가슴이 아프고, 고통도 이겨내야 하고, 슬픔도 참아 내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나를 기쁘게 하기 보다는 너를 기쁘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을 할 때에는 아픔과 자기 희생이 따른다. 내가 원하는 기쁨과 네가 원하는 기쁨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너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올바르게 키우고, 올바르게 성숙시키고, 너를 올바르게 성장시키기 위해서 내가 치르는 힘듦은, 비록 겉으로는 힘들게 보이지만, 기쁨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참으로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진정으로 기뻐하도록, 세상을 올바르게 키우고, 올바르게 성숙시키고, 올바르게 성장시킬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을 십자가 상의 희생제물로 내어 놓은 것이었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 세상의 기쁨이 여러분에게는 근심이 되겠지만 이 근심이 머지 않아 기쁨으로 바뀔 것 »이라 말씀하시는 그분의 삶이 지금 우리들 안에서 파동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들의 정체성의 위기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조차도 세상의 기쁨을 추구하고, 세상의 욕망에 고개 끄덕이고, 그 욕망 추구에 편승하면서 살아 간다면, 그야말로 말세다.
그리스도인이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려면, 그가 사는 삶이 세상의 삶과는 좀 많이 달라야 한다. 세상은 구하지 않는 것을 나는 구할 줄 알아야 하고, 돈만 되면 뭔 짓이라도 서슴지 않는 이 세태에 대하여 가슴 아파할 줄도 알아야 한다. 나 살자고 너 죽이는 일이 얼마나 염치없는 짓인지, 나부터 살고 보자는 일이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지를 알아야 한다. 개발 논리 때문에, 순간의 어려움을 회피하려는 심보 때문에 소리 없이 죽어가는 생명들을 향해서도 눈물 흘릴 줄 알아야 한다.
힘 있는 자들, 부유한 자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 따라가지 못해 안달하다가는 예수님 만나기가 어렵다. 세상의 즐거움 나도 채우겠다고 따라 나섰다가는 그 길에서 정말 예수님 만나기 어렵다. 오늘 복음은 나에게 참 기쁨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라 채근한다.
여러분에게 오늘 복음은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