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5일 부활 제 6주일 생명주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하루에 열두번도 이랬다 저랬다 변덕이 죽 끓듯 하셨던 증조 할머니께서 1978년에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당시 예닐곱 살 밖에 되지 않던 나를 데리고 1년 가까이 매일 미사에 나가셨다. 그 시절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할머니 손에 끌려 매일 미사에 참석했다. 짐작컨대, 미운정, 고운정 다 드셨을 두 분 사이의 관계를 정리하시고자 했던 노력이었던 것 같다. 그 시절에는 평일미사가 수요일에만 저녁미사였고, 나머지 날들은 모두 새벽미사였다. 새벽 5시 30분 미사 참석은 당시 유치원생에 불과했던 나에게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한번은 할머니께 이렇게 물었다 : « 할매, 성당에 와 가노 ? » 할머니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 « 천당갈라꼬 » « 천당 갈라믄, 꼭 성당 가야되나 ? » « 성당에 가서 미사 꼭꼭 보고, 신공 열심히 바치고, 천주님 뜻 따라 살아야 천당 가지 » « 할매, 천주님 뜻이 뭐꼬 ? » « 사랑하라는 거다. 사랑하는 거 참 어려븐기라. 할매한테는 그기 제일 어렵더라. 그래도 천주님이 보우하사 내가 이래 살고 있제. ».
 
1938년,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결혼을 하셨다. 그리고 두 분은 함께 만주로 가셔서는 거기서 6년을 사시다가, 1944년, 조선이 곧 해방되리라는 소식이 들리면서 두 분은 귀국하셨다. 할머니는 귀국 후부터 당신의 시어머니, 나의 증조할머니로부터 호된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내 어린 시절의 증조할머니는 잔소리 대왕대비마마였다. 증조할머니는 신김치는 못먹는다고 해서, 할머니는 보름마다 김치를 늘 새로 담아야 했고, 깨끼한복이라는 것을 거의 사흘에 한 벌씩 갈아 입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7첩반상이 준비되어야 했었다고 한다. 증조할머니 뒤치닥거리는 모두 할머니의 몫이었고, 1972년 엄마가 시집온 이후로는 할머니와 엄마가 함께 나누어 했다.
 
증조할머니는 1917년에 나의 증조할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다. 그당시 증조할아버지는 지금의 배제대학교의 전신이었던 배제학당 출신의 엘리트셨고, 증조할머니는 지금의 정신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정신고등보통학교 출신의 신여성이셨다.
 
증조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할머니에게 미안하다느니, 고맙다느니 하는 말 한마디 하신 적이 없었고, 할머니가 무슨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꼭 « 이런 무식한 » 혹은 « 못배워서 », 혹은 « 깡통이라 든 게 없어서 »라는 말을 남발하셨다. 이런 증조할머니로 인해 아주 어릴 때부터 내가 알게 된 사실 둘, 첫째는 공부 많이 한 것과 인격수양은 따로라는 것, 둘째는 고부간의 갈등은 인성과 관련되는 것이지, 똑똑함과는 하등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이런 고생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홀로 계시는 증조할머니가 안쓰럽다며, 증조할머니께 속엣말 한번 제대로 못하셨고, 할머니에게도 미안하다는 말씀 거의 없으셨다고 한다.
 
1922년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겪고, 6.25를 겪으면서, 2남 2녀를 낳으셨지만, 살아계셨다면 나의 큰 아버지가 되고, 나의 큰 고모가 되셨을 2분을 당신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신 할머니, 만주에서 갖은 고생하며 사시다가, 옆집에 살던 중국 여자의 꾐에 빠져 아편 중독까지 되어버렸던 할머니, 해방된 조국에서도 늘 시어머니의 등살에 마음 편히 두발 뻗고 주무시지 못했던 할머니, 이런 할머니를 지탱해주었던 것은 천주님이셨다.
 
보따리 싸들고 친정으로 돌아가셨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할머니는 굳이 힘든 길, 십자가의 길, 사랑의 길을 걸어가셨다. 시어머니를 사랑하려고 평생을 애쓰셨고, 효자 노릇 하느라, 제 사람 제대로 따뜻이 대해주지 못했던 할아버지를 사랑하려고 애쓰셨고, 두 자식 저세상 먼저 보내놓고도, 남은 두 자식 어디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사람으로 키워내셨던 할머니는 분명 « 사랑하라 »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한 힘을 주시는 성령을 받았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
 
 « 서로 사랑하라 »는 주님의 계명은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한 듯 하다.   «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는 슬로건 아래, 악마와의 거래를 틀려고 하는 것들, 먹고 살기 위해 영혼을 팔고, 나라를 팔고, 몸을 팔고, 자식을 팔고, 예수를 팔고, 하느님을 파는 것들, 돈이면 많은 게 가능하다며, 돈밖에 모르는 돈 놈들, 오직 나 밖에 모르는 나뿐 놈들, 그런 놈들을 거슬러, « 그래도 사랑 »을 노래하는 사람,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 사람,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할 줄 아는 » 사람,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 »하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으로 살려면, 분명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한 것 같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빠듯한 세상살이에 기민하게 반응하고, 권력도 좋지만, 그래도 권력은 짧고, 돈은 기니까, 돈을 신봉하는 것들, 그래서 돈 앞에서나 권력 앞에서는 기계처럼, 자발적 복종을 하는 것들이 참으로 많은 세상이다. 그러나 그런 자발적 복종에 고개를 치켜 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붙은 만국 공통어는 미친놈, 혹은 빨갱이다.
 
어쩌면 성령을 받아 천주님의 뜻에 살아가려는 이들은 모두 미치거나 빨갱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불리는 이들을 도와 주고, 그들과 연대하며, 더 이상 자발적 복종이라는 상태에 머물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바로 « 서로 사랑하자 »가 아닐까 싶다. « 서로 사랑하자. 연대하자 », 이것이야 말로, 죽음으로 점철되는 세상에 저항하고, 죽음에 저항하고, 불의에 저항하고, 거짓선동에 저항하시는 부활과 생명의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 그리스도인의 지상 과업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지상 과업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성령을 보내시는 것 같다. 오소서 성령님, 마라나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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