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을 돌이켜 보면, 빵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나가서 40일간 단식하셨을 때에, 광야에서 당하신 첫 번째 유혹이 빵에 대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돌들이 빵이 되게 하는 기적을 거부하셨다. 그런데, 광야까지 당신을 따라온 몇 천명의 사람들에게는 기적으로 빵을 많게 해서 먹이셨다. 그 전에 유혹을 당하실 때에는 거부했던 것을 왜 이 자리에서는 행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이 몇 천명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놓고 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자기들끼리도 마음을 열었기 때문에 온당한 방식으로 빵을 받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지식을 통해서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들이 매일 먹는 밥과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빵은 분명 다른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살아 남기 위해 먹는 것이 우리가 먹는 밥,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빵이라면, 제대로 사람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진실하고, 정의롭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빵, 바로 참 생명을 살게 하는 빵이라는 것이다. 어제 복음 말씀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자 : « 나는 생명의 빵이요.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요.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는 내 살이요. » (요한 6,51).
가파르나움 회당에 모여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들은 예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아예 예수님을 무시했다. 생존을 위해 자기들이 매일 먹는 빵만 알았지, 참 생명을 살기 위해 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내놓으셨던 참 삶의 길을 걸어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예수께서 차리려고 하신 밥상을 그들은 깨달으려고 하지 않았다. « 당신들이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당신들은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라는 말을 듣고, 그저 기겁을 하고, « 우리가 그러면 식인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냐?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라는 투정 가득한 말만 내뱉을 줄 알았지, 그 말씀은 사람의 아들이 보여주는 참 삶의 모범을 따르라는 말씀임을 그들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그분의 몸을 먹게 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바로 그분의 몸이 된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수많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분의 뒤를 따라서 자신을 세상의 생명을 위한 빵으로 내어 놓았듯이, 우리도 그분의 몸이 되고, 그분의 빵이 되어 이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 놓는다는 것을 뜻한다. 2천년 전 5천명을 배 불리게 먹인 빵은 이제 우리들이라는 말이다. 세상을 위해,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어 놓을 때, 우리는 바로 2천년 전 갈릴래아에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재현하는 산 증인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일, 그 일을 너무 거창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자. 그 일은 사람이 사람에게 따스함으로 다가가는 일, 사람이 사람에게 너그러움으로 다가가는 일, 사람이 사람에게 평화로움으로 다가가는 일이다. 그러니, 여의도에 계시는 ‘그분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말자. 수십 조의 재산을 가진 재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의 몸뚱아리가 생명의 빵이 되는 이 기적을 체험하는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늘 기억하자.
우리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