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2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는 예수님보다는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필립보와 안드레아, 그리고 보리빵 다섯 개를 안드레아에게 가져다 주었던 한 소년에게 내 시선이 더 끌린다. 필립보는 많은 군중을 먹여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놓고 « 도저히 가망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라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 안드레아는 필립보보다는 조금 더 적극적이긴 하지만, 오십보 백보다. 안드레아는 예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 «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 이 두 제자들에 반해 소년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먹을 것을 모두 다 내어 놓았다. 보리빵은 예수 시대에 가장 가난한 이들이 먹는 음식이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등장인물 가운데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내어놓았던 이름 모를 소년을 상상하노라면, 10년 전 세월호에 탑승했던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오버랩된다. 어쩌면 똑같아도 이리 똑같을까? 어른들 먼저 구해야 한다고, 나이 많은 할아버지들, 할머니들에게 생명줄을 양보하고, 모자라는 구명 자켓마저도 친구에게 자기 것 입으라고 내어준 그 아이들이었다. 복음서에는 그 소년에 대해서 더 이상의 언급이 없지만, 분명히 예수께서는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온 소년을 축복하셨을 것이다. 그 소년을 닮은 단원고등학교 학생들도 분명 예수께서는 축복하실 것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어줍잖은 동정심이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더 가난하게 하고, 세상일을 더 망친다고. 잘난 사람들은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말까지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들에게 되묻고 싶다. 얼마나 사람들을 도와 줘 보았느냐고, 사람들을 도와주고 나서 그런 말이라도 하느냐고 말이다. 원칙과 법이라는 것이 무엇을 위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냐고 말이다.
책상 앞에 앉아서 머리만 굴리면, 결코 사람을 알 수 없다. 사람은 만나야 하고, 시간과 공간을 함께 공유해 보아야 조금씩 알아간다. 나누면, 나눌수록 없는 사람들은 더 달라고, 더 내놓으라고 말하는 뻔뻔함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나눔은 우리들에게 우리보다 더 못해 보이는 사람들을 향하게 한다. 그리고 실제로 나눔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우리보다 더 못해 보이는 사람들이 결코 우리보다 못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이 참으로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하도록 창조된 것이 인간이다.
평생을 살아도 사랑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알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10년 전 단원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은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했다. 사랑이라는 진리를 몸소 보여 주었던 이 학생들에게 참으로 미안하고, 참으로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