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주님 수난 성 금요일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합디까? » « 요한 세례자라고도 하고 다른 이들은 엘리야라고도 하며 또 다른 이들은 예언자들 중 한 분이라고도 합니다 » « 그러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하겠습니까? » «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 « 그렇습니다. 나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나는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제관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 그러자 베드로가 나무란다. 수난하는 그리스도이신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 내 뒤로 물러가라, 사탄아.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
성당에 왜 나가십니까? 믿음이 당신에게 무엇을 가져다 줍니까? 사람마다 제각각 대답들이 다를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좇아가려 애쓰는 이른바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함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하늘이 주는 복을 얻고, 내 가족들이 무사하고 행복하며, 마음의 평안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성당에 나온다고 하는 사람들은 참 많다. 복을 바라는 마음, 그것은 모든 종교들의 근본요소다. 기복이 없으면, 종교가 아니다. 문제는 지나치게 복만 바라는 것에 있다.
고통을 겪고, 마침내는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스승을 제자인 베드로가 나무랐다. 3년을 따라다니며, 한자리, 좋은 자리, 높은 자리를 공공연히, 대놓고 바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베드로도 내심 복을 바랬다.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의 말, 표정, 행동거지, 그것들은 우리들의 것들과 참으로 많이 닮았다. 그래, 그것이 무엇이 그리도 나쁘단 말인가? 그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그 마음을 몰라주고, «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호통치는 스승이 섭섭하고, 매정하기까지 하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 어떻게 그런 사람의 마음도 몰라주는가 말이다.
이제 모두 눈을 감으십시오. 그 스승이 이제 발가벗겨지고, 채찍을 맞으며 생살이 뜯겨나가고 있다. 배 불리 먹여주고, 아픈 사람 어루만져 고쳐 주고, 버림받은 사람 손잡아 일으켜주며, 엷은 미소 띄워주던 그 스승에게 늘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지만, 정작 그 스승이 잡히고,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당하게 되자, 모두들 그를 버리고 도망 가버린다. 사람 낚는 어부들이 되게 하려고 당신이 손수 뽑고,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주었던 제자들마저도 스승을 배반하고 뿔뿔이 흩어져서는 각자 다락방으로 숨어버린다. 스승이 붙잡혀서 사형선고를 당하는데,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잡혀갈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 형틀을 지고 해골산으로 홀로 오르다 힘에 부쳐 쓰러지기를 세 번이나 했을 때, 사람들은 어느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가냘픈 여인 하나가 용기를 내어 피와 땀으로 얼룩진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주지만, 이내 제지 당하고 만다. 지나가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공권력의 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들고 가준다. 3시간 가까이 총독관저로부터 해골산 정상에 이르기까지 십자가를 지고 간 예수님, 드디어 십자가에 못이 박힌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버려지고, 철저하게 외면당한다. 하느님에게서까지도 버림받은 것처럼 보인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외친다: «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 -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잠시 정신을 잃다가 다시 깨어나서는 «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숨을 거둔다.
이제 감았던 눈을 다시 뜨십시오. 살아가면서 힘들 때도 있고, 외로울 때도 가끔은 있다. 어떤 이들은 견뎌내기 힘든 고통이 닥쳐올 때, 왜 유독 나만 이런 일을 겪느냐고, 내가 살아생전 무슨 죄를 그리도 많이 지었길래 이런 고통을 겪느냐고, 하늘을 원망하고, 땅을 치고 통곡하기도 한다. 그런 이들의 고통으로 말미암는 신음소리, 통곡 소리는 그 자체로 주위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고, 가슴을 찢어놓기도 한다.
16년 전, 2008년 겨울, 유학 보내 놓은 자식이 기숙사 옥상에서 갑작스럽게 발을 잘못 헛디뎌 사고로 죽음을 당했다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는 소리를 들은 부모를 만난 적이 있다. « 신부님, 당신이 믿는 그 잘난 하느님한테 물어봐주쇼. 왜 우릴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정말로 하느님을 믿은 우리가 어리석기 그지 없었소. 하느님이면, 우리 자식 죽어갈 때 당신 뭐하고 있었소? 발가벗고 두 팔 쩌억 벌리고 있으면, 그걸로 그만인게요? 우리가 언제 당신더러 우리 대신 십자가 지라고 한적 있었소? 자식놈 건강하게 공부 잘 마치고 오라고 매일 미사 나가고 매일 묵주알 수십 번을 굴리고, 성당에서 일이라는 일은 도맡아 하다시피 했는데, 우리가 당신한테 쏟은 정성이 얼마인데, 왜 당신은 우리를 배신하는거요? »
한 시간 가까이 침묵이 흐른 뒤, 그 어머니가 말했다: « 우리 아이 지금 즈음 하늘에서 우리 보면서 엄마 아빠 울지 마세요. 저 잘 있어요. 하느님이랑 성모님이랑 함께 엄마 아빠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렇게 말하겠지요? 하느님도 우리 딸아이 이쁘게 머리 쓰다듬고 계시겠지요? 그렇지요 신부님? »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변화시켰을까? 분명한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게서 일어난 일이 그들에게도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 라는, 철저한 버림받음에서 터져 나오는 처절한 울부짖음에서 « 아버지,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라는 철저한 내어 맡김이 그 부모에게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고백한다. 무소불위無所不爲, 아니 계신 곳 없고, 전지전능全知全能,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도 끝도 없는 분이라고.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런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낯선 하느님, 우리를 당황케 하는 하느님을 만난다. 아들이 죽어갈 때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하느님, « 왜 버리느냐 »고 피맺힌 한마디의 말을 토해낼 때 침묵으로 일관하는 하느님, 그래서 나약하기 그지없고, 무능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하느님, 그런 낯선 하느님을 만난다.
그러나, 그 무능함과 나약함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하느님은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임마누엘,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임을 드러내신다. 게세마니 동산에서 «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건 하실 수 있사오니,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라고 솔직하게 두려움을 드러내는 아들에게 «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라고 말하게 하는 하느님, « 자 일어나 가자 »라고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하느님, 십자가 위에서 철저한 버림받음에서 터져 나오는 처절한 울부짖음에서 철저한 내어 맡김으로 넘어가는 예수님의 말을 듣고 있던 하느님, 그래서 아들의 수난과 죽음에 완전히 함께 한 하느님, 임마누엘이라는 당신 이름에 정녕 충실했던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신다.
십자가는 그래서 우리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장으로 다가온다. 인간이 기뻐할 때, 함께 호탕한 웃음으로 기뻐하고, 인간이 슬퍼할 때, 함께 눈물을 흘리고 인간이 외로워할 때, 곁에 와서 소주잔을 기울여주는 하느님, 인간이 한 맺혀 울부짖을 때, 함께 땅을 치고 통곡하는 하느님, 무능해 보이고, 나약해 보이지만, 인간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서 인간과 함께 하는 하느님, 바로 그 하느님을 우리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