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카 성야 강론 - “돌을 치워라!”(요한 11,39)
주임신부 2024. 3. 30, 덕계성당
먼저, 영상 하나 소개해 드립니다. (‘알렐루야’ 영상)
오늘 이 시간, 우리 주님의 ‘부활’을 맞으며, 우리 모두도 ‘알렐루야’를 노래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렐루야’를 제대로 힘껏 노래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노래 잘하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어야 할까요? 악보 보는 법을 공부해야 할까요? 노래하는 발음 연습을 해야 할까요? 그것도 아니면, 합창단에 가입해서 함께 노래하면 될까요? 이것저것 생각했지만, 그것이 답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답은 다른 곳에 있었는데,... 그래서 오늘 강론의 주제를 요한복음 11,39에 나오는 주님 말씀인, “돌을 치워라!”로 정해 보았습니다. 돌을 치워야만, ‘알렐루야’를 정말 잘 노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을 보면, ‘여인들이 무덤으로 갔다. 그런데 무덤을 막은 큰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마르 16,2-4 참조)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기서 ‘돌은 무엇을 의미할까?’를 생각해 봅니다. 일반적으로, 돌은 죽음의 세계에 가두어 놓는 것을 의미하지요. 하지만 돌은 이미 치워져 있습니다. 돌은 죽은 자를 가두어 둔다는 이 일반적인 생각에 처음으로 도전이 생기게 됩니다. 새로운 이 도전이란 바로 ‘부활은 돌을 치워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 때문에, 부활의 힘으로, 죽음의 무덤을 굳게 막고 있는 무겁고 큰 돌은 힘없이 굴러 떨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동시에 우리도 신앙인으로서 부활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부활의 삶은 돌을 치워버리는 삶을 낳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돌을 치우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돌’은 무엇을 뜻할까요? 돌은 우리 삶을 짓누르고 있는 장애들을 상징합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돌들은 다양할 것입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질병일 수 있고, 어떤 지적인 관념일 수 있으며, 정치적 또는 사회적 제도일 수도 있습니다. 돌은 또한 우리를 얽어매는 온갖 부자유일 수 있으며, 양심의 고통, 심리적 억압과 불안, 타인을 향한 증오심과 적개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만이 지고 가야 할 짐일 수도 있습니다. 돌은 또한 지나친 소유욕과 물욕, 명예와 권력의 추구일 수 있으며, 교만, 아집, 독선, 이기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돌 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 사회 안에서 만나는 돌도 있을 것이며, 올해로 25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 본당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런 여러 형태의 돌들에 우리가 짓눌려 살아가는 한, 우리가 돌을 치우지 않는 한,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기는 힘 드리라고 봅니다. 무언가 무겁고, 부담스럽고, 부자유스러운 느낌입니다. 살아 있다는 말을 들으며 살고 있으나, 실상은 부활이 아닌 죽음을 살고 있는 꼴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부활의 삶이란, 부활 때문에, 부활의 힘으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돌을 치워 버리는 삶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부활은 돌을 치우게 해 줍니다. 이로써, 어둠의 골짜기를 벗어나 빛의 세계로 나아가게 해 줍니다.
이 기쁘고 은혜로운 날, 이곳 주님의 집에 모여 오신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주시는 축복과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우리 본당 공동체에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대해서는, 이렇게 기도드리며 강론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 “부활하시어 돌을 치워버리신 주님, 저희도 부활의 삶인 돌을 치워 버리는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럼으로써, 우리도 ‘알렐루야’를 제대로 힘껏 노래하게 해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