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인간 본연의 됨됨이를, 그 성품과 인격의 진면목을 가장 잘 알아볼 수 있을 때는 그가 가장 어려운 처지에 내몰렸을 때입니다. 체면이나 명성, 재력이나 인맥 등이 다 무의미해지고 떨어져 나가 이른바 사회적 지위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때 한 사람을 가장 잘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한 사람이 자신이 해온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하고, 더욱이 그가 자신의 비극적 죽음을 명백히 예견하고 있다면, 그 때 그의 말과 행동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말과 행동이 그 인생의 마지막 말과 행동이 된다면, 그것은 그의 삶의 총괄이요 그의 마음과 정신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던 당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마지막 말과 행동이고, 그러기에 예수님의 삶의 총괄이요 예수님 마음과 정신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말과 행동을 전해줍니다. 주님 마지막 말씀과 행동은, 첫째로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이고, 두번째는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오늘 요한복음은 만찬 때의 일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신 일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대신 그 만찬의 의미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뜻한다는 것을 오늘 제1독서와 제2독서가 전해줍니다. 주님의 마지막 만찬은, 주님의 죽음이야말로 죽음과 멸망을 눈 앞에 둔 인간을 구하기 위한 죽음이며, 주님의 몸과 피야말로 생명의 하느님과 새롭게 맺는 약속과 계약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마지막 만찬 안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 중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하고 노래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성체성사를 통해 첫번째 성목요일 밤의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죽음과 멸망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게 해주십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신 첫번째 성목요일, 그날이 바로 성체성사가 세워지고 사제의 직무가 태어난 날입니다. 오늘밤 우리는 그 밤을 기억하고 그 밤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주님의 마지막 말씀과 행동은 발씻김입니다. 주님의 발씻김은 주님 죽음의 의미, 주님 마지막 만찬의 의미, 그리고 성체성사의 의미를 밝혀줍니다. 발씻김에서 드러나는 성체성사의 근본적인 정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헌신과 봉사입니다. 자신의 몸을 바쳐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파스카 만찬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헌신과 봉사는 사제의 헌신으로, 세상을 위한 하느님 백성 모두의 봉사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따라, 강론이 끝나면 발씻김 예식이 있을 것입니다. 이 발씻김 예식에 우리 본당의 사제들만이 아니라, 우리 본당 모든 신자들이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사목위원들도 함께 할 것입니다.

발씻김은 또한 정화를 의미합니다. 물로 씻는 것 자체가 정화를 뜻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은 세상의 헛된 가치에서, 탐욕과 욕망에서 정화되어 하느님의 숨결로 우리 생명을 채우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발씻김은 치유를 의미합니다. 신발을 제대로 신을 수 없었던 옛 사람들의 발은 언제나 상처투성이였습니다. 험한 세상과 평탄치 않은 길에서 얻은 상처가 고스란히 우리의 발에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난 발을 보듬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발씻김은 비뚤어지고 상처난 우리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 성 목요일의 밤, 주님께서는 당신의 피로 우리를 하느님 백성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몸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과 희생을 기억하며 우리가 서로 헌신하고 봉사하며 살라고 명하시고, 세상의 가치에서 정화되고 탐욕과 욕망에서 해방되라고 가르쳐 주시며, 우리 마음 속에 숨겨진 상처를 치유해 주십니다. 첫번째 성 목요일의 밤, 주님은 당신의 마지막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도록 당신 생명의 성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오늘밤 우리를 정화시켜주시고 치유해주시는 예수님의 발씻김 속으로, 당신의 몸과 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주시는 첫번째 성목요일 밤의 마지막 만찬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거행하는 발씻김 속에서, 우리가 거행하는 성체성사 안에서 첫 성목요일 밤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현존해 계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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