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3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극도에 달할 때에, 살인의 충동을 느낀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했던 것은 예수께서 하신 행동들과 말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 정도를 넘어서서 하느님 자신의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의 눈에 예수는 거짓 예언자였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사칭한 사기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기는 했지만, 그 하느님은 그저 하늘에 계신 분이지, 결코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 어떻게 감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저 나자렛 시골 촌놈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느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고, 무소불위無所不爲하시고, 무시무종無始無終하신 분이신데, 어떻게 감히 한낯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 그런 하느님을 사칭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느님은 세상과는 대단히 먼 분, 하늘에 계시는 분,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세상사를 쥐락펴락하시는 분이라고만 믿어온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그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원해 내시고, 홍해 바다를 건너가게 해주시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함께 해오신 하느님이라 할지라도, 결코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며, 그 종락 무엇이길래,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천사들 다음 가는 자리에 우리를 세우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시편 8편)라고 노래는 할 수 있어도, 그 하느님이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유대인들을 보면서 하느님은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온전히 드러내고자 하시는데,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면서,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다고, 그냥 당신은 우리와는 먼 저 하늘 위에 앉아 우리가 올려드리는 제사의 향내나 맡으시고 조용히 찌그러져 계시면 이 세상 일은 다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그 유대인들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 그들만의 굳건한 철옹성을 공고히 했던 그 유대인들을 보면서 말이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완고한 유대인들은 여전히 21세기에도 존재한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신 하느님의 아들은 당신을 건물 한 중간에다가 박제해 놓고, 그저 머리 조아리고 그 앞에 무릎 꿇고 두손 모으는 대상으로만 여기는 21세기 유대인들을 두고 무어라 하실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살아가는 생활은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떤 구체적인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할 것을 요청한다. 생명과 죽음, 선과 악, 자유와 방종, 행복과 불행, 무의미와 의미, 책임과 무책임, 사랑과 무관심, 등, 삶 속에서 일어나는 선택의 순간에 신앙인은 죽음이 아닌 생명을, 악이 아닌 선을, 방종이 아닌 자유를, 불행이 아닌 행복을, 무의미한 것이 아닌 의미 있는 것을, 삶에 대한 책임을, 무관심이 아닌 사랑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권리와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도좌 권고, “복음의 기쁨”7항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이 말씀을 풀어본다면 이렇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윤리생활을 더 잘 하기 위해서이거나, 혹은 정의, 평화, 자유, 사랑, 인권, 진리, 민주주의 등과 같은 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만나고, 그분을 내 삶의 주님으로 받아 들이며, 그 분의 길을 따라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역사는 또다시 반복된다는 말이 마치 진리처럼 여겨져서는 안된다. 역사는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불평등, 불의, 부정, 거짓, 중상모략, 종북몰이, 공안통치, 언론 독재, 등, 이러한 세상의 악을 방치해 두거나, 거기에 자발적인 복종을 함으로써, 또다시 반복되는 역사를 살아서는 안 된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를 죽여버린 유대인이 되지 않겠다는 것은 이러한 세상의 악, 세상의 죄를 물리치는 것이다. 그저 내 안에 있는 죄스러운 것을 회개하고, 고치고, 나 자신만 바른 길로 나아가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했던 그 유대인들의 아류, 21세기의 유대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21세기의 유대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