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2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사람을 살리려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도, 안식일 때문에 다른 날을 잡아야 하고, 거룩하다고 자화자찬하는 바리사이들과 하느님의 법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는 율법학자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세상, 그 세상에서 과연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인식일법도 지키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비위도 좀 맞추어주고, 그랬으면 오죽 좋을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알뜰살뜰한 유혹들에 눈길 하나 주지 않으시고, 내치셨다.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중간만 해라 », « 모난 돌이 정 맞는다 » 이런 류의 말들이 횡행하는 현실이다. 짧고 굵게 사는 것보다는 길고 가늘게 사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하는 세상이다. 중도의 길, 중용의 길, 어느 한쪽에도 치우침 없이 사는 길이 지혜로운 길이라고 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금의 시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옛날 중국 춘추, 전국시대를 두고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라고도 한다. 그 당시 중국은 여러 나라로 나뉘어 오랫동안 전쟁을 거듭하던 혼돈의 시대였고, 그 혼돈을 가중시키던 것은 백 가지 사상으로 제각각 목소리를 높여 서로 다투었던 지식인들이었다. 이러한 대혼란의 시대에는 사람 목숨이 파리처럼 가벼워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타고 난 수명을 어떻게 하면 끝까지 다 누릴 수 있을까?’라는 문제는 당시 사람들의 큰 관심사일 수 밖에 없었다.
그 시대의 수많은 지식인들은 상하 관계, 주종 관계, 좌우 관계에서 어느 한쪽의 치우침도 없는 삶의 철학, 중도의 철학을 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은 대개 ‘현실 참여’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현실에 참여했다가, 지배 계급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고, 몰매를 맞을 수도 있고, 박해를 당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고난 수명을 끝까지 다 누리기 위해서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리는 그런 말들, 어느 한쪽에도 치우침 없는 그런 철학과 그런 논리를 펼쳐 내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 천명天命에 따라야 한다 »고 했다. 사실은 그러한 위기의 시대에 자발적 복종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말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평탄한 중도의 길이라는 것은 사실 없다. 외줄타기의 명인들을 보면, 그들은 어떤 때는 왼쪽으로 치우쳤다가, 어떤 때는 오른쪽으로 치우쳤다가 그러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그렇게 반복하지 않으면, 그 외줄에서 떨어지기 때문이다.
예수의 길은 중도의 길이 아니었다. 당시의 지도층들, 백성 위에 군림하던 이들, 그들 편에 선 길이 아니라, 돈 없고, 힘 없고, 빽 없는 서러움 속에서 사람같이 살 수도 없는 억압의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가난하고, 힘없고, 버려진 사람들을 택하시고, 그들 편에 서셨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아버지의 일임을 당신의 온몸으로 보여주셨다. 그렇게 살다가 죽음을 맞으셨던 예수,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 예수의 길을 걸어가는 신부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이래 저래, 사람들로부터 쑥덕거림과 손가락질과 욕설을 들을 지라도, 예수의 그 편향된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백 년도 채 못 살 인생, 그거 하나 편하자고, 천년 만년 주님과 함께 누릴 부활의 삶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