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7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 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입니다. » 이 말씀을 한 귀로만 혹은 귓등으로 들으면 ‘편가르기를 하자는 말씀인가?’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그러나 주님께서 편가르기를 하자고 하지는 않으실 것 같다.
 
어릴 적 동네 친구들 혹은 초등학교에서 친구들 여럿이서 했던 “오징어 육군”, 혹은 “오징어 달구지”라는 놀이가 떠오른다. 오징어 모양으로 놀이판을 만들고, 두 편으로 나뉘어 한편은 오징어 머리부분에서 오징어 다리쪽으로 통과해서 오징어 몸통 안쪽을 누비다가 다시 오징어 머리로 올라가고, 다른 한편은 상대편이 오징어 머리로 올라가지 못하게 막는 그 놀이 말이다. 이 놀이를 할 때에 가장 많이 욕 얻어 먹는 아이가 꼭 한 둘은 있는데, 몸싸움 안 벌이려고 요리조리 피하기만 하는 아이, 자기 편에 서지 않는 아이, 자기편으로 함께 모아 들이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어린 시절 그런 놀이들에 익숙해져 있었던 사람들이 이 나라 이 땅의 현재 60대, 70대들이다. 놀아도 언제나 편을 만들어서, 우리편, 니네들편으로 갈라 놀았던 덕분에, 그리고 투철한 반공교육 덕분에, 아군과 적군이 누구인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는 이들, “미국은 좋은 나라, 일본은 쌩양아치, 북한은 쳐부수고 무찔러야 하는 괴뢰집단”, 수학의 인수분해 공식보다도 더 단순하고, 간단하게 한 나라에 대한 정체성과 그 나라에 대한 태도를 배웠다. 그게 다가 아니다라는 것을 우물 안 개구리 시절을 조금 지난 이제서야 조금씩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뇌리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편가르기는 좀체 수그러들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수직적인 사회계급제도는 이미 1905년 갑오경장 때에 법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1948년에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에도 나온다. 그러나 법전에는 없지만, 엄연히 이 나라, 이 땅에는 여전히 계급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계급 덕분에 떵떵거리며, 거들먹거리는 이들도 생각보다 참 많다. 계급을 존속시키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써대는 이들이 여전히 목에 힘주는 세상, 학벌에 따라, 스펙에 따라, 능력에 따라, 차등제를 실시하고, 학벌 없고, 스펙 없고, 능력 없으면 사람으로서의 가치도 없다고 편가르는 세상, 그 세상은 그야말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그토록이나 쫓아내려고 하셨던 마귀의 짓거리가 판을 치는 세상임에 틀림 없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지만, 학벌이 딸리거나 스펙이 딸리거나, 능력이 모자라거나 쩐도 백도 별로 없으면, 이 나라에서는 그 모자람이 죄가 되기도 한다. 문화의 다름, 사상의 다름, 입장의 다름, 상황의 다름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내편이 아니면, 무조건 나쁜 것, 없애버려야 할 것, 무찌르고 쳐부수어야 할 것으로 정의 내리고 낙인찍어 버리는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의 일,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이들은 참으로 고달파 보인다. 더욱더 무서운 것은 예수의 일, 하느님의 일을 하는 그들을 이 나라 이 땅의 찌라시 신문이나 찌라시 언론매체들은 국가를 전복하고 음해하려는 악의 축, 종북 세력, 한마디로 ‘빨갱이’ 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예수의 일을 빙자하고, 하느님의 일을 빙자해서 국가를 뒤집어 엎으려는 매국노, 데모꾼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정의의 편에, 진리의 편에 서는 것, 편가르기하는 마귀를 쫓아내는 주님의 편에 서는 것이다. 이 일은 결코 또 다른 편가르기가 아니다. 이미 갈라진 것을 다시 잇는 일이다. 갈라져 서로 어르릉거리는 이들을 다시금 화해시키는 일이다.
 
왜 성당에 나오는가? 우리가 가진 신앙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가? 소박한 행복? 가족들의 평안과 화목? 흔히 수신修身하고, 제가齊家하고, 치국治國하면, 평천하平天下한다고 말한다. 수신도 제대로 안되어 있는 인물이, 무슨 제가를 하며, 그런 이가 치국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수신과 제가와 치국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이다. 우리네 삶이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머리 깎고 다 버리고 산으로 외딴 섬으로 떠나버리지 않는 이상은, 수신은 제가와 치국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고, 제가도 수신과 치국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고, 치국도 수신과 제가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동시에 이 세가지 일을 이루는 유일한 길, 그것은 진리의 편에 서는 것, 주님의 편에 서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경천하고, 애인하는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다. 오직 이 길만이 흩어진 것을 한데 모으고, 갈라진 것을 다시 이으며, 마귀가 들끓는 이 세상에서 마귀를 쫓아내는 길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의 길, 하느님의 길 위에 서 있다. 그 길을 걸어가려는 우리들을 하느님은 축복하신다. “너희는 마치 사람이 제 아들을 업고 다니듯,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이곳에 다다를 때까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줄곧 너희를 업고 다니시는 것을 광야에서 보았다.”(신명 1, 31)는 말씀처럼, 진리의 길, 정의의 길에 서 있는 우리를 축복하신다. 힘들지만, 때로는 조롱과 손가락질이 우리 앞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 함께 그 길을 걸어감이 어떠하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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