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5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남녀가 만나 서로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자신보다는 그 혹은 그녀를 먼저 생각하고, 먼저 배려하고, 상대방을 우선으로 여긴다. 내 뜻보다는 너의 뜻이 더 중요하고,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짜증내고 화를 낼까 봐 내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조심스럽게 그 사람에게 다가간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사랑의 변형되면서부터는 주객이 전도되어 버린다.

오직 나의 뜻과 나의 방식과 나의 고집이 더 중요하고,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나를 떠받들어 주지는 못할 망정 나를 존중해주고 나를 사랑해주고 나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말은 « 그렇게 하는 게 사랑이다 », «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이잖아 »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먼저 챙기려는 욕심이 가득한 말일뿐이다. 그런 말들이 자주 오가다 보면, « 사랑하니까 그런다 », « 그러는 내 마음이 더 아프다 », « 이게 다 너를 위한 것이다 »라는 말들도 자주 쓰게 된다. 마치 말 안 듣는 아이를 때리며 엄마들이 하는 말, « 때리는 내 마음이 더 아파 »같다. 하지만 사실 누가 더 아픈가? 때리는 엄마보다 맞는 아이가 더 아프다.

 
변형되는 사랑, 변질되는 사랑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다. «왜 이렇게 하지 않느냐 », «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 ? », « 왜 잘못될 것이 뻔한 길로 자꾸만 들어서느냐 ? », «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느냐 ? », « 왜 너는 너만 생각하느냐 ? », « 왜 너는 되고, 나는 안되느냐 ? » 이런 말들이 오가면서 울고불고 난리가 나고, 십 원짜리가 오가고, 동물농장에 있던 온갖 동물들의 새끼들이 서로의 입에서 튀어 나온다. 급기야, 차라리 내 마음을 기가 막히게 알아주고, 내 말을 척척 따라주는 로보트를 사랑하는 것이 더 나을 거라고 기어이 보따리를 싸고, « 바이, 짜이찌엔 »하며 헤어진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다. 내 말을 착착 알아서 듣고, 내 뜻만 쫓아오는 로보트나 노예를 만드는 일은 사랑이 결코 아니다. 사실, 사랑은 <나로 인해 그 사람을 얼마나 바꾸었는가>가 아니라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얼마나 바뀌었는가>를 물을 줄 아는 것이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렇다.
 
내가 창조주라고 한번 상상해보자. 나는 모든 것을 다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지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어떤 사람을 지을 것인가? 당연히 내 말을 잘 따르고 나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하느님에게만은 이것이 당연하지 않으셨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런 로봇이 되게끔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느님은 당신의 창조물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까지도 허락하셨다. 심지어 하느님은 당신의 창조물이 당신을 배신하고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자유까지도 허락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참아 받으셨다. 왜?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 내 뜻만을 이루는 일은 반쪽짜리이고, 사랑하는 상대방이 나의 사랑을 통해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 나에게로 돌아와 비로소 나와 함께 나누는 사랑이 진짜임을 알고 계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다.
 
그렇다. 이것이 하느님 방식의 사랑이다. 참으로 따라 하기 힘든, 하지만 반드시 우리도 성취해야 할 사랑의 방식이다. 오늘 제1독서를 보자. 하느님께서는 결코 하나만을 제시하지 않으신다. «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신명기 30,15)라고 하신다. 우리 입장으로서는 굳이 죽음과 불행의 방법은 선택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반대쪽은 아예 깡그리 없애 버렸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다. 그것마저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신다. 자유가 없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라는 달콤한 사탕을 주고는 그에 대한 댓가로, 벌을 내리시고 고통을 내리시고 심판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들 스스로가 죄 받을 곳으로 가고 우리 자신이 고통을 당할 짓을 하며 내가 먼저 나서 심판을 휘두르는 것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어제부터 우리는 사순 시기를 살고 있다. 우리 앞에도 오늘 제 1독서의 말씀처럼, 언제나 행복과 불행, 십자가와 외면, 희생과 탐욕, 소유와 나눔이 펼쳐져 있다. 문제는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이다. 나를 사랑하는 분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할 줄 알면, 우리는 참 생명이요, 참 진리이신 하느님을 선택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될 것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그게 마치 신앙이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면, 결국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기만이고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으며, 가짜 하느님, 자기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을 두고 하느님이라 여기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나로 하여금, 내 뜻 안 들어준다고 가당치도 않게 하느님마저 바꾸려고 덤비는 우리 때문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채, 저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분 그 분을 위해서라도, 이 40일만이라도 그분이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살피고, 그분의 뜻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나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한다.

여러분에게 오늘 독서와 복음은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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