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29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오늘 복음에서 무덤에 살던 사람은 단순한 정신병 환자가 아니었다. 그는 큰소리로 자기는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으려 하는 존재라는 것, 하느님을 배척하는 존재라는 것을 큰소리로 밝힌다. 마귀새끼임에 틀림없다.
마귀 들린 사람을 예수께서는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를 구해내셨다. 그런데 마귀의 손아귀에 놓여 있던 사람을 구해내신 예수님을 두고, 마을 사람들은 갑론을박했다.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온 마을 사람들은 자기네들에게서 떠나가 줄 것을 요청한다. 왜 그랬을까? 오늘 복음에는 왜 마을 사람들이 예수께 떠나 줄 것을 청했는지 그 이유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똑 같은 사건을 보도하는 루카 복음 8장에서는 사람들이 두려운 생각이 들어 예수께 떠나 달라고 청했다는 말씀이 나온다(루카 8, 37 참조).
무엇이 두려웠을까? 마을 사람들이 예수를 두려워했던 것은 예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방식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마을 사람들이 키우던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를 모조리 바다로 빠뜨리셨다. 마귀 들렸던 사람은 그 지역 사회에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사회에서 별 쓸모도 없는 이 사람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돼지를 희생시켰다는 것, 수많은 돼지 떼가 귀신 들린 사람보다 훨씬 더 값어치가 나가는 데, 이런 사실을 무시한 예수님이 두려웠던 것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마귀 들린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보다는 바다에 빠진 돼지 떼에 더 눈길이 가고, 그 돼지 떼를 더 아까워하는 세상, 한 사람의 생명보다 돈이 더 귀한 대접을 받는 세상이 우리 사는 세상이다. 돈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경제 때문에, 자본 때문에 예수님께 떠나가 달라고 악다구니를 써 대는 세상이다. 교회는 그저 교회 안에서 열심히 기도나 하고, 예배나 드리고, 조용히 거룩하게 미사만 드리면 될 것이지, 세상에 대해서 뭘 안다고 세상에 대해서 떠들어 대느냐고 일장훈계를 늘어 놓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을 향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도좌 권고 « 복음의 기쁨 » 182항과 183항에 나오는 말씀 한 대목을 읽어드리면서 오늘 강론을 마치고 싶다: « 복음화 사명은 모든 인간 존재의 전인적인 진보를 포함하고 또 요구합니다.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오로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만 종교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그리스도인의 회개는 특히 « 사회 질서와 공동선 추구와 관련된 » 모든 것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종교를 개인의 내밀한 영역으로 가두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국가 사회 생활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말라고, 국가 사회 제도의 안녕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대하여 의견을 표명하지 말라고, 그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참다운 신앙은 결코 안락하거나 완전히 개인적일 수 없으며, 언제나 세상을 바꾸고 가치를 전달하며 이 지구를 이전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물려주려는 간절한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확실히 « 정의가 모든 정치의 목적이며 고유한 판단 기준 »이라면, 교회는 «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됩니다. »
모든 그리스도인은, 또 사목자들은 더 나은 세계의 건설에 진력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 182, 183항).
모든 그리스도인은, 또 사목자들은 더 나은 세계의 건설에 진력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 182, 183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