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4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지난 해 내가 가진 것들 중에 가장 고맙게 여긴 물건은 네비게이션이었다. 작년 3월 20일부터 어제 1월 3일까지 거의 매주 월요일마다 본당에서 새벽미사가 끝나는 대로 차를 끌고 전국 16개교구 중에 군종교구를 제외한 15개 교구의 성당들이나, 그 교구들의 관할구역 내 광장 어느 곳을 찾았었다. 네비가 없었으면, 한참을 헤매었을 텐데, 네비 덕분에 대부분의 장소들에 별 어려움 없이 잘 도착했다. 하지만, 최첨단 장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네비에 나오지 않는 길들을 갈 때면, 조금은 불안하다. 그럴 때에는 이정표가 참으로 고맙게 느껴진다. 


    어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은 길 잃고, 집 잃고, 나라까지 잃게 될까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야 할 길을 제대로 정확하게 알려준 이정표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이나, 두분 다 세상에 태어날 때, 당신들의 나라 유다는 벌써 70여년 전부터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다. 


    바빌론 유배 이후에 이스라엘은 국가의 재건을 위해서 여러 가지 운동을 벌였다. 사해(四海) 근방의 일종의 수도단체인 꿈란(Qumran) 공동체는 광야의 수도원에 숨어 살면서 철저한 금욕과 단식, 절제의 생활을 했다. 그리고 ‘어둠의 자손들’과 대결하는 ‘빛의 자손들’의 최후의 승리를 기다렸다. 


    바리사이파는 율법을 엄격히 지킬 것을 촉구하고, 이로써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촉진할 수 있다고 여겼다. 혁명당(젤롯)은 로마 제국의 점령군에 대한 무력항쟁으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촉진하고자 했다. 한적한 시골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도와 인내를 갚아줄 놀라운 기적을 바랬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많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로마의 점령에 협력하거나 되는 대로 살아갔다. 절망에 빠져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이라는 의식조차도 다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고, 그저 하루하루를 지내던 사람들도 많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짜 메시아들, 거짓 예언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해 백성들을 현혹시키기도 했다. 불안했던 백성들은 이리 우르르, 저리 우르르 몰려 갔다 몰려 왔다 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다림과 절망, 포기의 한 가운데에서 세례자 요한이 등장하면서 그는 회개의 세례를 부르짖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예언자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헛된 맹세도 하지 않았고, 말과 행동에도 신뢰가 갔다. 참으로 진지했다. 백성들은 금새 알아보았다. 세례자 요한이 정말 제대로 된 예언자라는 것을 말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의 공생활 직전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살면서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실 때,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확하게 참된 길을 알려주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세례자 요한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은 예수님께 쏠렸다. 세례자 요한을 참된 예언자라고 여기며 따르던 이들이 마침내 진짜 주인공을 향해 삶의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메타노이아, 방향전환, 회개가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던 어두운 밤을 걷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참 생명의 길로 인도했던 이정표였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세례자 요한을 2000년 전의 한 역사적인 인물로만 자리매김해버리고, 그를 성경 속의 한 인물로만 박제해 버린다면, 성경을 헛되이 읽는 것이고, 복음을 들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는 것이다.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 우리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이정표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서 우리 뒤에 계시는 분, 우리 삶의 바탕을 이루시는 분,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가 이정표로서의 삶을 살아 가야 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구원을 향한 이정표와 화살표를 발견하고 있는가? 


    우리가 오늘날의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것은 ‘아니오’라고 용감하게 말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예언자가 바로 우리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요한’,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 라는 이 말을 오늘날 우리가 발 디디고 서 있는 이 나라 이 땅의 가난한 이들, 힘없는 이들, 소외된 이들에게 울려 퍼지게 하는 일, 바로 지금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 일을 하려고 우리가 지금 여기에 모여있다. 오늘 복음은 나에게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깨치게 한다. 여러분에게 오늘 복음은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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