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셈법이 세상의 셈법과는 사뭇 다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논리에 익숙한 우리에게 ‘정당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경제 정의의 기초이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 일꾼과 품삯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나중에 와서 적게 일한 일꾼과 먼저 와서 종일 일한 일꾼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는데 이는 보편적 경제 정의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공로에 비례해서 베풀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께 봉사하는 시간이나 양을 기준으로 은총을 받거나 구원이 주어진다면, 우리가 받을 상은 각자에 따라 크게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양으로 잴 수 있거나 차별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자비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은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키고 바치라고 말씀하시기보다 베풀고 용서하며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어린 자녀가 부모를 신뢰하고 부모로부터 배워서 사람이 되듯이, 우리도 하느님께 신뢰하고 그분으로부터 은혜로움을 배워, 그 은혜로움을 우리 스스로 실천하며 살라고 예수님께서는 가르쳤습니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뛰어난 사상가인 러스킨은 오늘 복음의 비유에 깊은 감명을 받고, 이 비유의 정신이야말로 결과를 중요시하고 효율성을 앞세워 인간을 경쟁으로 내모는 당시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열쇠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당시의 사회를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려 한 네 편의 글을 한 권의 책으로 엮으면서 오늘 복음의 한 구절을 따와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인간의 모든 제도와 이념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물고기가 어항에서 지내다 큰 바다로 나갈 때 더 큰 자유와 행복감을 누리는 것처럼, 우리도 무한하신 하느님 품에 안길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