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 속, 잊힌 순교자들

가톨릭부산 2023.08.09 11:59 조회 수 : 14

호수 2770호 2023. 8. 13 
글쓴이 손숙경 프란치스카 로마나 
고문서 속, 잊힌 순교자들
 


 
손숙경 프란치스카 로마나
온천성당 · 전 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
 

 
   30여 년 전 언양지역의 창녕 성씨 가문에서 소장한 고문헌을 발견하였다. 이 기록물은 성씨 가문의 구성원이 집안의 내력을 적어 놓은 것인데, 뜻밖에도 천주교와 관련한 놀라운 사실이 적혀 있었다. 이 가문의 성진탁이란 인물이 중국 교구 아래 놓였던 조선교구를 분리-독립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는 상업 거래로 중국 북경을 드나들면서 조선교구가 분리-독립하는데 도움을 주어 중국 관계자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이후 귀국하여 우의정 이지연의 소환을 받아 상경한 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는데 아마도 1839년의 기해박해에 죽음을 당한 것 같다. 
 
   언양 길천에 거주한 양반인 그가 무역에 종사한 배경에는 가문의 숨은 내력이 있었다. 그의 할머니는 영조 통치기에 영의정을 지낸 홍치중의 딸인데 재혼으로 그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혼례식을 마치고 신랑집으로 가기 전에 신랑이 죽어 조선시대 유교의 법도에 따라 정절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노론 가문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홍치중도 15세의 딸이 평생 수절하는 것을 보기는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딸이 남편을 따라 죽었다 하고 평소 교분이 있던 성씨 가문의 사람과 상의하여 한양에서 먼 거리인 언양의 창녕 성씨 가문의 성동좌와 몰래 결혼을 시켰다.
 
   두 가문은 결혼할 때 족보에 배우자의 가계를 등재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여 실제로 족보에도 성동좌의 배우자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결국 성진탁은 가문을 밝혀야하는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다. 이는 그가 양반으로서 무역에 종사한 연유이며 신분 구분이 없는 천주교를 수용하게 된 한 배경이 되었다. 또한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이미 그의 가문에서 천주교를 수용한 사실도 말해준다.
 
   일반적으로 영남지역은 1801년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에 의해 천주교가 수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천주교 초기 수용 단계에서 언양에서는 중앙과 마찬가지로 천주교를 학문으로 수용한 사실을 보여준다. 성진탁은 당시 천주교의 중심이라 할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언양지역 출신으로서 단지 천주교의 수용 차원을 넘어서서 천주교회의 제도적 발전에 직접 기여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행적은 주목된다.
   한 가문에 전승되는 기록물에서 한국천주교회사의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드러나지도 알려지지도 않은 순교자들은 여전히 많이 존재한다. 더운 여름의 햇빛만큼이나 강렬했던 그들의 신앙이 세상에 빛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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