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가톨릭부산 2023.04.12 11:07 조회 수 : 13

호수 2753호 2023. 4. 16 
글쓴이 윤경일 아오스딩 
광야

 
 
 
윤경일 아오스딩
좌동성당 · 의료인, 국제구호단체 한끼의식사기금 이사장
ykikhk@hanmail.net

 
   황량하고 쓸쓸한 곳. 척박하고 적막한 곳. 짐승들의 공격이 도사리는 위험한 곳. 광야는 사람이 제대로 살 수 없는 땅이다. 가난한 구호현장을 다니면서 광야와 같은 곳을 많이 만났다. 가장 열악했던 곳을 기억해보니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보보스팜’이다. 독재자 무가베 대통령이 도시정비사업을 한다며 가정집을 깡그리 허물어버리고 아무런 보상도 없이 시민들을 허허벌판의 황무지로 내쫓아버렸다. 사람들의 분노와 좌절은 오죽했을까. 구호 사업지를 발굴하는 차원에서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보보스팜 입구에 도착하자 안내하던 현지인 수녀님께서 더 들어갈 수는 없다고 말했다. 더이상 들어가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울타리 너머로 헐벗은 광경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자비의 기도를 청하고 돌아서야 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도 또 다른 광야가 아닐 수 없다. 이 땅에는 돈이 세상을 지배하며 가진 이들은 더 가지려고 집착한다. 물질주의에 빠져 향락이 넘치고, 사회적 강자들에 약자들의 인권은 무시당하고, 갑질로 인한 안타까운 죽음이 반복되는 등 힘이 부족한 대다수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풍요 속의 빈곤 세상이다.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물질주의 세상이야말로 삭막한 광야가 아니겠는가.
 
   성경에도 광야에 대한 언급이 곳곳에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사십일 동안 단식하신 후 광야에서 악마로부터 세 가지 유혹을 받으셨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지냈던 세례자 요한은 스스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없자 여종인 하가르가 대신해서 아브라함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니, 하가르는 여주인보다 우월함을 느꼈고, 그리하여 사라로부터 구박을 받아 광야로 쫓겨나야 했다. 
 
   광야에는 절규와 갈증만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하가르가 광야에서 좌절해 있을 때 주님의 천사로부터 후손을 번성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그리고 하가르는 “당신은 ‘저를 돌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창세 16,13)라고 말한다. 광야는 고난으로 차 있는 곳임과 동시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그분께서는 버려진 이를 위로와 사랑으로 품어주셨기에 희망과 용기를 얻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광야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특별한 장소가 된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로서 고독하고 외로울 때가 많다. 하가르의 체험처럼 현실에서 외면당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맞이할수록 주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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