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세대를 위한 미안함과 위로 그리고 연대
이영훈 신부 / 노동사목
20년 전 너무나 가슴 아파했던 뉴스가 아직도 저에게서 떠나가지 않습니다. “나는 어린이인데 ….”라는 내용이 반복되는 10살이 채 되지 않은 아이의 자살 유서 내용입니다. 이 유서에는 그 나이 때 놀지 못하고 빽빽한 일정표에 따라 휴일도 없이 밤늦을 때까지 수많은 학원들을 다녀야 했던 한 아이가 왜 어른들은 자신보다 더 많은 여유로움 속에서 즐기며 살고 있는가라는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2014년 세월호, 그리고 2022년 이태원 등 수많은 아이들, 젊은이들이 죽어갔습니다. 정확하게 일치되지는 않겠지만 저는 ‘20년 전 그 아이의 세대’가 아직도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아니, ‘나 자신’이 그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우리 사회 안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에 여전히 무관심했고 방치했다는 죄스러움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이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위로를 건넨 적이 있지만 왠지 이 말이 위로라기보다는 책임 회피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아플 수밖에 없는 청춘이 아니라, 그 아픔이 없어지도록, 줄어들도록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그러한 책임과 의무를 다해 왔는지 오히려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에게 계속 되물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 청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었다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우십니다. “아이야, 일어나라.”(루카 8,52) 그런데 우리는 그 과정에서 딸의 죽음에 슬퍼하는 부모와 진심으로 함께하는 사람들, 이미 죽었으니 가만있으라는 사람들, 심지어는 예수님을 비웃던 사람들과 같이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향한 다양한 모습들을 봅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고통 앞에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고통으로 나아가 마주하시고 손을 잡으십니다. 인간 고통의 원인인 우리의 무관심과 책임 회피 그리고 불의한 사회 구조의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십니다. 인간 고통과 죽음을 향한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직접 보여주십니다.
고통 앞에서는 주저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파하는 야이로의 딸과 같은 지금의 세대에게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관심과 회피, 책임 전가와 어설픈 위로 그리고 주저함과 포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고통을 접하고 분노하며 우리의 안락한 고립에서 벗어날 때까지”(『모든 형제들』 68항)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안함을 대신하는 것이고, 진정한 위로이자, 그들을 고통에서 희망으로 나아가게 하는 연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