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도 꾸리아 훈화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신 “노년에 대한 교리 교육2 : 장수, 삶의 상징과 기회”를 나누고, 함께 고민하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선조들의 족보를 통해 우리는 그들의 긴 수명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성경은 그들이 수 세기에 걸쳐 살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노년은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선조들이 자녀들을 낳은 후에도 그렇게 오래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버지와 아들이 수 세기 동안 함께 살았습니다!(노인과 젊은이가 함께 살았습니다!) 의례적 양식으로 서술된 이 세속적 시간의 흐름은 장수와 족보 사이의 관계에 강력 한, 매우 강력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창조된 우주 안에서 이처럼 새로운 인간 생명의 전달이 느리고도 장기간에 걸친 과정을 필요로 했던 것 같습니다. (생략) 삶의 경험을 해석하고 삶의 수수께끼에 맞서기 위해서는 세대 간의 상호 지지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오랜 시간을 요구합니다. 이 오랜 시간 속에서 인간의 영적 자질도 서서히 함양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류 역사에서 지나간 모든 시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곧, 인간 조건의 판세가 새로운 경험과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질문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처음부터 침착하게 해결해야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문화적 기억의 축적은 알려지지 않은 경로를 마주하는 데 필요한 친숙함을 더해줍니다. 전달되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동화되는 시간은 항상 인내를 요구합니다. 이제 우리 삶의 모든 단계를 괴롭히는 과도한 서두름은 모든 경험을 보다 피상적으로 만들고 “영양가를 떨어뜨리게” 합니다. 젊은이들은 갈라진 시간의 무의식적인 희생자들입니다. 그들은 서둘러 무엇을 해야 하는 물리적 시간과 제대로 “무르익을”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삶의 시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긴 수명은 이처럼 느리게 가는 시간과 서두름의 피해를 체험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노년은 확실히 더 느린 리듬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관성의 시간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러한 리듬의 척도는 속도에 집착하느라 미처 알 수 없었던 삶의 의미의 공간을 모든 이에게 열어줍니다. 하지만 노년의 느린 리듬을 만나지 못하면 이러한 공간은 모든 이 앞에서 닫혀버립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7월의 마지막 주일을 조부모와 노인의 날로 지내려 한 것입니다. 삶의 두 극단의 세대(어린이와 노인)가 서로 손을 잡으면 또 다른 두 세대(젊은이와 성인)가 서로 유대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며, 이로써 인류의 모든 존재가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세대 간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젊은이와 노인, 어른 사이에 대화가 없으면 모든 세대는 고립되어 메시지를 전할 수 없습니다. 조부모라는 뿌리에 연결되어 있지 않은 젊은이는 - 나무가 뿌리에서 힘을 얻는 것처럼 - 힘을 받지 못하며, 좋지 않게 자라고, 병들고, 기준점 없이 자랍니다. 따라서 인간적인 필요로 세대 간의 대화를 모색해야 합니다. 이 대화는 정확히 양극단의 세대인 조부모와 손주들(노년과 청년) 사이에서 중요합니다."1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긴 수명, 노년의 느린 리듬의 시간이 세대 간의 대화를 위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기회를 통해 노년은 삶의 의미를 청년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단, 이 시간과 대화는 서두름 보다 침착함이 요구되고 인내로워야 합니다. 그렇게 노인과 젊은이는 함께 살아갑니다. 우리가 함께 할 때 나무가 뿌리에서 힘을 얻는 것처럼 젊은이들은 인생의 선배들로부터 신앙의 진수를 전수받게 됩니다. 이번 한 달 동안 우리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자리에서 인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주 1 https://www.vaticannews.va/ko/pope/news/2022-03/papa-francesco-udienza-generale-anzianitempo-longevita-bambini.html, 번역 김호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