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2725호 2022. 10. 2 
글쓴이 신정민 데레사 

하느님께서는 부서진 것들을 사용하십니다
 
 

신정민 데레사 / 남산성당 · 시인
jungmin1204@hanmail.net


 
 

      어느 가을날, 한적한 시골을 거닐다 도리깨질하는 장면을 본 적 있습니다. 거두어들인 들깨 다발을 마당에 펼쳐놓고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었습니다. 곡식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래도 농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을 내려쳤습니다. 단단한 곡식이 부서져야 빵이 되고, 포도주도, 향수도 잘게 부서짐을 통하여 만들어진다는 히브리 격언이 생각났습니다. 단단하고, 질긴 음식도 우리의 입안에서 고르고 잘게 부서져야 소화되어 영양분이 됩니다. 사실 알고 보면 도리깨질은 아프라고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서 때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껍질을 벗겨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농부이신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도리깨질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왜 나만 때리냐고 불평도 합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도리깨질을 쉬지 않으십니다. 더 많이 부서지라 하십니다. 더 많이 깨어지라 하십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하십니다. 
 

   다시 가을입니다. 그리고 깊어갑니다. 가을은 가장 아름다울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가을은 가장 오래된 계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도 하느님의 말씀처럼, 그리고 가을처럼 원숙한 인격을 가졌을 때가 가장 아름다울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여름의 땡볕과 잦은 폭풍의 시절을 보내고 신앙의 열매를 맺기 위해선 부서지고, 내려놓는 과정이 있어야겠구나 싶습니다. 그럼 삶에서 부서지고, 내려놓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겸손과 이해라 생각합니다. 
 

   겸손과 이해는 살면서 쉽게 많이 쓰는 말들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말입니다. 누구나 나는 이해가 많은 사람이며 겸손하게 살고 있노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치켜올림을 받고 싶은 마음이 언제고 준비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누군가 나를 만만하게 보거나 하대한다는 기분이 들면 이해는 한순간에 오해가 되고, 겸손 또한 한순간에 자만으로 돌변합니다. 이해, understand는 누군가 서 있는 단상 아래 있는 것입니다. 나를 낮추지 않으면 불가능한 말입니다. 겸손이란 말도 그렇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 마음이 늘 깨어있지 않으면 어려운 말입니다.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 존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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