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간질하지 맙시다!
우세민 윤일 요한 / 가톨릭신문 기자
화물노동자들이 지난 6월 7일부터 8일간 총파업을 한 바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이들이 왜 파업을 했는지 아시나요? 화물노동자들은 ‘안전운임제’를 유지하고 적용 대상을 늘여달라는 요구로 총파업에 들어갔습니다. 안전운임제는 운송시스템상 과로와 과속, 과적 문제로부터 자유롭기 힘든 화물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노동여건을 보장하고 도로 안전을 지키자는 취지로 시행된 제도죠. 어쩌면 화물노동자뿐 아니라 많은 국민들의 생명과도 직결된 문제입니다.
그런데 총파업기간 동안 언론은 대체로 “화물 파업으로 물류가 차질을 빚고 있어 산업계에 피해를 주고 있다.”는 내용 위주로 보도를 했습니다. 또한 “뚜렷한 명분이 없는 소모적 행동을 한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논리에만 맞춰 보도를 이어갔습니다. 그들이 왜 화물차를 세워 손해를 입어가면서도 파업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마치 국민들과 화물노동자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전달과 건전한 여론 형성에 앞장서야 할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동자와 기업의 편을 갈라 국민들에게 한쪽 입장만 공감하도록 하는 언론의 행태는 이미 오래전부터 공공연히 있어 왔습니다. 해묵은 이념 갈등에서부터 요즘의 젠더 갈등까지… 언론은 제 역할을 하기보다는 이런 갈등구도를 넙죽 받는 데 급급합니다.
언론이 왜 그러는지에 대한 고민에 앞서, 먼저 우리가 이해관계를 내세우며 서로 싸우지 않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절실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5)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각자 이해관계가 아니라,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 함께 묶여 파견된 제자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박노해(가스파르) 시인의 ‘그 겨울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마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