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의 후손은 살아있다.
손숙경 프란치스카 로마나 / 온천성당 · 전 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
3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의 나는 2014년 복자품에 오른 이정식, 양재현을 비롯한 부산교구의 순교자들에 대한 행적을 조사-연구하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시대 천주교를 믿어 죽임을 당한 이들의 행적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서울 출신이나 양반 엘리트 가운데 순교한 이들의 행적은 그래도 관청이나 교회측 자료 등을 통하여 어느 정도는 그릴 수 있다. 그렇지만 지방사회나 중간계급 이하의 신자들은 기록의 부재로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천주교와 관련 있는 자들은 사학죄인(邪學罪人)으로 처벌받아 가문과 지역사회에서 배척당하였고, 천주교와 관련된 문서 기록들에서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기에 지방에서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여 죽은 사람들의 행적을 조사하려면 오랫동안 발로 뛰면서 밑바닥을 훑는 작업이 필요하다.
동래지역 순교자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에 대한 기록이 매우 미미한 가운데 다행히 양재현의 순교를 기억하는 후손들이 증언한 소중한 구술 조사 기록이 남아 있어 새로운 조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 기록으로 양재현의 거주지와 신분 정도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좌수였으므로 동래지역 양반 가문의 구성원으로 추정되었기에 그의 행적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좀처럼 행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결국 많은 노력을 통하여 양재현을 비롯한 순교자들의 사적을 밝힐 수 있었다.
더불어 이 과정에서 순교자의 후손이 겪은 고통이라는 새로운 역사와 만난 것도 각별한 의미가 있다. 박해 직후 양재현의 후손은 경북 의성으로 이주한 후 다시 각지로 흩어졌다. 이 와중에 선조에 대한 많은 정보를 잊은 채 오로지 순교했다는 사실 하나만 전승되어 그 행적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양재현의 후손들은 여전히 신앙생활을 지속하고 있었으며, 선조의 순교 사실을 알려주니 너무나 기뻐하였다. 후손들의 기쁨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직후 경기도와 대구에 흩어져있던 10여 명의 후손은 부산으로 한달음에 달려와 오륜대순교자성지에 있는 선조 양재현의 묘소 앞에서 극적인 순간을 맞이하였다. 당시 오륜대한국순교자박물관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는데, 박물관의 출입구 벽면 위에 ‘순교자의 후손은 살아있다’라고 크게 적힌 글귀가 정말이지 마음에 와닿았다.
그렇다. 순교자의 후손은 살아 있었던 것이다. 박해로 점철된 한국교회의 역사를 돌아본다면, 우리 모두는 순교자의 후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