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걸어라

가톨릭부산 2022.03.10 10:38 조회 수 : 23

호수 2696호 2022. 3. 13 
글쓴이 오지영 젬마 
그냥 걸어라

 
 
오지영 젬마 / 반여성당 · 시인
gemma784@hanmail.net

 
   걸어서 가는 길에는 소나무가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다. 숨을 헐떡이며 걸어왔던 그 길이 배수지 공사가 시작되면서 공영주차장이 자리하고 위에는 운동기구가 있는 체육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넓지 않지만 한 바퀴 돌 수 있는 곳과 아름다운 정원이 생겼다. 쉴 수 있는 의자도 있다. 간단한 공연도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면서 새벽에는 에어로빅을 가르치는 강사 덕에 하루의 시작은 생기가 돈다. 장산 자락에 있는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베란다 창문을 연다. 창을 통해 자연의 경치를 빌리는 중이다. 코로나19로 힘들어지는 요즘,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건 은총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떠나버린 방처럼 마음의 방도 허전해서 하루에도 몇 번이고 십자성호를 긋고 지낼 때가 있다. 그럴 때 신부님이 그랬다, 그냥 걸어보라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는 마음으로 사순 시기를 보내다 보면 기쁨의 부활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묵주를 손에 들고 성모님과 함께 나름대로의 길을 걷기로 했다. 장산자락에 있는 집을 핑계 삼아 그다지 높지도 낮지도 않은 길을 걸었다. 포슬포슬한 흙길이다. 그 사이로 천천히 길을 걷다 보면 숨소리가 살짝 높아진다. 그럴 때 앞으로만 걷던 길을 뒤돌아서게 되면 온몸이 상쾌해짐을 느낀다. 조화로운 높낮이의 집들이 탁 트인 시야에 들어와 답답한 가슴속을 맑게 해준다. 오목조목하게 지어진 집들이 우리들의 삶인 것 같아 마냥 정겹다. 다시 앞으로 걷다 보면 흙과 어우러진 소나무도 만나고 도토리나무도 만나게 되는 산길로 접어든다.   
 
   혼자 걸어가는 길은 침묵의 시간이지만 때로는 자연의 소리가 침묵의 시간에 함께하기도 한다. “숨 쉬는 것 모두 주님을 찬양하여라.”는 시편기도가 저절로 되뇌어진다.
 
   운동화 소리가 귀에 익을 때쯤이면 체육공원에 도착한다. 간단한 운동기구들과 하나하나 눈맞춤을 하다 보면 약간의 땀이 흐른다. 
 
   내려갈 시간이다. 내려가다 보면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들꽃들이 많다. 정확한 이름들은 모르지만 머리로만 아는 이름들을 기억하며 내리막을 걷는다. 예수님의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느림을 친구삼아 걷게 된 길이다. 내 안의 나를 발견하는 길이기도 하다.
호수 제목 글쓴이
2875호 2025. 6. 22  “당신은 내 빵의 밀알입니다.” 강은희 헬레나 
2874호 2025. 6. 15  할머니를 기다리던 어린아이처럼 박선정 헬레나 
2873호 2025. 6. 8  직반인의 삶 류영수 요셉 
2872호 2025. 6. 1.  P하지 말고, 죄다 R리자 원성현 스테파노 
2871호 2025. 5. 25.  함께하는 기쁨 이원용 신부 
2870호 2025. 5. 18.  사람이 왔다. 김도아 프란치스카 
2869호 2025. 5. 11.  성소의 완성 손한경 소벽 수녀 
2868호 2025. 5. 4.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사랑하십시오. 김지혜 빈첸시아 
2865호 2025. 4. 13.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안덕자 베네딕다 
2864호 2025. 4. 6.  최고의 유산 양소영 마리아 
2863호 2025. 3. 30.  무리요의 붓끝에서 피어나는 자비의 노래 박시현 가브리엘라 
2862호 2025. 3. 23.  현세의 복음적 삶, 내세의 영원한 삶 손숙경 프란치스카 로마나 
2861호 2025. 3. 16.  ‘생태적 삶의 양식’으로 돌아가는 ‘희망의 순례자’ 박신자 여호수아 수녀 
2860호 2025. 3. 9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5년 사순 시기 담화 프란치스코 교황 
2859호 2025. 3. 2  ‘나’ & ‘우리 함께 together’ 김민순 마리안나 
2858호 2025. 2. 23.  예수님 깨우기 탁은수 베드로 
2857호 2025. 2. 16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이사 43,1) 최경련 소화데레사 
2856호 2025. 2. 9.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안경숙 마리엠마 수녀 
2855호 2025. 2. 2  2025년 축성 생활의 날 담화 유덕현 야고보 아빠스 
2854호 2025. 1. 29  이 겨울의 시간 윤미순 데레사 
주보표지 강론 누룩 교구소식 한마음한몸 열두광주리 특집 알림 교회의언어 이달의도서 읽고보고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