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2681호 2021. 12. 12 
글쓴이 정연순 안나 
아직도 저를 버리지 않으셨군요!

 
정연순 안나 / 금정성당 · 소설가
statisjys@hanmail.net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추억은 미력하나마 소환할 수 있습니다. 그 공간에 소읍의 밤하늘에 뜬 손바닥만 한 별이 있습니다. 그 별은 동녘 하늘에서 크게 빛나며 쓸쓸해 보였습니다. 이별을 앞둔 마음이 별에 투영되었기 때문입니다. 
 
   대학 2학년 때입니다. 더는 미룰 수 없다며 5살 터울 위인 언니가 수녀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자신의 묵주를 원하지도 않는 제게 건네주고 가족의 반대도 물리치고 훌쩍 고향 집을 떠났습니다. 저는 당시 통학 중이었습니다. 동해에서 강릉, 다시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학교에 다다르는 시간 동안 눈물을 흘렸던 날은 부조처럼 십수 년이 지나도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다. 
 
   제 곁에 있을 것만 같았던 언니에 대한 지독한 배신감과 그리움으로 제게 세례명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졸업 후 언니가 보고 싶어 긴 시간 기차를 타고 부산에 있는 예수성심전교수녀원에 갔습니다. 다음날 새벽 언니의 권유로 함께 앉은 경당에서 졸면서 들었던 청아한 새소리는 이젠 마음에만 새겨야 합니다.
 
   2021년 9월 10일, 신호철 비오 주교님과 신부님들이 참석한 가운데 수녀원에서 기공식이 있었습니다. 노후화된 건물을 허물기 전, 마지막으로 개방한 경당에 가 보았습니다. 오십 중반을 훌쩍 넘긴 제가 스무 살 초반 때 언니와 함께했던 시간을 더듬고 있었습니다. 언니는 더는 그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 근육암으로 하늘나라로 간 지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옛날 언니가 수녀원으로 들어가던 날 제게 건네줬던 묵주는 없습니다. 하지만 등산객으로 복잡했던 금정산 산길에 떨어져 있던 묵주가 제 눈에 들어온 날 저는 멈춰 “주님, 아직도 저를 버리지 않으셨군요!” 하는 외마디와 함께 주님께 승복하고 말았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지금은 안나로 불릴 수 있음에 감사하며 언니가 항상 기도를 부탁했던 조카도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언니는 불모지인 집안에 하느님 깃발의 씨알을 뿌린 별입니다. 돌이켜보면 주님은 언제나 곁에 머물며 인내하는 기다림의 명수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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