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2642호 2021.03.14 
글쓴이 박선정 헬레나 
십자가의 의미를 가르쳐 준 혁이

 
박선정 헬레나 / 인문학당 달리 소장, 남천성당

 
   벌써 십 오육 년은 되었나 보다. 혁이를 만난 것이.
 
   대학 시절 ‘한마음 한몸 운동’에 참여했었다. 그때 알게 된 곳들은 대체로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들이었다. 함께 있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들,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 스무 살이던 내가 처음으로 가게 된 곳은 ‘소화영아재활원’이었다. 그곳 보모 언니들과 함께 종일 이 일 저 일을 하다 보면 한밤중이었다. 드디어 평화인 줄 알았다. 그러나 밤에도 밤새 자신의 머리를 부딪치며 우는 자폐아가들 소리에 더욱 잠을 이룰 수가 없는 밤이었다. 모두가 갖고 있지는 않는 ‘엄마’라는 존재, 그곳의 아이들에게는 그 엄마라는 존재가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아픈 몸으로 태어난 그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보다도 더 보살핌과 사랑이 필요한데, 정작 그 아픈 몸 때문에 오히려 혼자가 된 거다. 매일 밤 스무 살의 나는 그런 생각들로 울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시간과 삶에 쫓겨 후원만 하던 내게 전화가 걸려왔다. 재활원 원장 수녀님의 조심스러운 부탁 전화였다. 소아마비가 심하다 보니 일반 가정에서는 돌보기가 어려워서 다섯 살이 되도록 한 번도 위탁을 가 본 적이 없는 아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떠나고 텅 빈 집에 혼자 남는 아이를 애처롭게 바라보던 순간, 간호사 출신에다가 거기에서 아이들과 생활을 해 보았던 내가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와 혁이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혁이는 중증 소아마비여서 혼자서는 앉아 있을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대소변을 해결할 수도 없는 아이였다. 그러나 지능이 높고 감성이 뛰어난 아이였다. 웃음이 함박꽃이던 아이였다. 그렇게 한 달간의 위탁이 끝나고 다시 재활원으로 떠나던 날, 나는 뒤돌아서서 목을 놓아 울었다. 혁이도 ‘우리집’, ‘엄마’, ‘누나’를 부르며 꺽꺽 울었다. 그랬던 그 아이가 벌써 스무 살이 다 되어간다. 그리고, 세상에는 여전히 수많은 혁이가 살고 있다. 
 
   이후 나는 혁이가 안겨 주고 간 그 십자가를 늘 가슴에 안고 산다. 그 십자가는 아픔이고 고통이다. 누군가의 아픔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함께 아파하고 뒤돌아볼 수밖에 없는 무엇이다. 하지만, 그 십자가의 아픔을 아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조금씩 사랑으로 변하는 것이리라.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부활의 의미도 이것이 아닐까. 사순 시기, 잠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가시밭길을 함께 걸어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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