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2628호 2020.12.20 
글쓴이 박선정 헬레나 
화장실, 가장 강렬한 예술적 체험 장소였다

 
박선정 헬레나 / 남천성당·인문학당 달리 소장 whitenoise99@hanmail.net

 
   미국 서부 도시인 샌프란시스코에는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이 있습니다. 혹시  그 미술관에 가시게 되면 꼭 화장실에 들어가 볼일도 보고 나오시기를 권합니다. 시간이 좀 더 허락한다면 각 층에 있는 화장실을 전부 다 들르시면 더욱 좋습니다. 네? 무슨 얘기냐고요? 
 
   우선, 이 미술관 화장실 복도에 들어서면 화장실을 이용하고 나온 사람들이 약간은 흥분한 얼굴로 화장실 안에서의 놀란 경험을 이야기 나누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혹시, ‘파란 종이 줄까’, ‘빨간 종이 줄까’라도 경험한 것일까요. 허허, 비슷합니다. 사실 이 미술관은 층마다 화장실 전체를 온통 다른 색깔로 칠해 놓았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어느 층은 온통 빨간색이고 어느 층은 온통 파란색입니다. 사람들은 평범한 화장실을 예상하고 문을 열었다가 깜짝 놀랍니다. 그 놀람은 전혀 기분 나쁨이 아니라 하나의 환호와도 같은 것입니다. 설마 화장실에서 색깔이 주는 예술적 감흥을 체험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곳의 관장은 아마도 예술은 액자 속 작품에만 있는 것도, 화려한 조명을 받는 전시장 벽에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것도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어쩌면 미술관에서 가장 볼품없는 그곳에서 말입니다. 그런데도 저를 포함한 많은 관람객들은 정작 미술관의 대표 작품은 기억하지 못해도 이곳 화장실에서 체험한 그 강렬한 색의 경험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곧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입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가장 성스러운 그 날의 조명을 받는 곳 역시 왕자를 위한 화려한 분만실이 아니라 소와 말이 머무르는 마구간이지요.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파묻혀 종종 잊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예수님은 분명 가장 가난하고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셨지요. 그리고는 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시다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끝내 가시관을 쓰신 채 돌아가셨지요. 그러니 예수님은 지금도 분명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선하고 힘없는 이들과 함께 하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미술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예술적 체험이 그곳 전시장이 아닌 ‘화장실’에서의 강렬한 색감의 경험이었듯이, 우리 일상에서의 예수님과의 조우 역시 어쩌면 가장 낮은 곳에서의 가장 힘없는 사람들과의 만남에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을 만나고 싶으신가요? 그럼 마구간으로 가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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