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묵은 도시락

가톨릭부산 2020.09.02 13:35 조회 수 : 76

호수 2613호 2020.09.06 
글쓴이 박선정 헬레나 
40년 묵은 도시락

 
박선정 헬레나 / 남천성당, 인문학당 달리 소장

 
   얼마 전 내가 자란 시골집으로 가는 길에 주유소를 들렀다. 건너편에 차 한 대가 서고는 차에서 내린 남자가 주유를 하는 내내 힐끔힐끔 나를 쳐다본다. ‘참 내.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얼른 주유를 마치고 자리를 뜨려는데, 그 남자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어쭈? 
 
   “니, 혹시 선저이 아이가? 내, 국민학교 때 종아다. 모르겠나?” 어, 그러고 보니 낯이 익다. 전교생이라야 얼마 안 되는 시골학교인데다 6년을 한 학교에서 다녔으니 다 안다. “아이구야, 니 종아 맞네.” 그렇게 우리는 거의 40여 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반가워했다. “점심 묵었나? 내가 점심 사꾸마.” “아냐. 가야돼. 다음에...” “내가 니 만나면 꼭 밥을 살라꼬 40년을 기도했는데.” 엥? 40년을 나한테 밥 살라꼬 기도했다꼬? 
 
   어릴 적 점심 도시락을 못 싸오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나마 나는 꽁보리밥일망정 도시락은 꼭꼭 싸갔지만, 그 친구는 종종 빈 도시락만 들고 학교에 왔다. 겨울이 되면 교실 한가운데 난로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고, 그 난로 위에 쌓아 올린 양은 도시락들이 얌전히 데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심심찮게 사건이 터졌다. 누군가가 남의 도시락을 먹어버리는 것이다. 누구냐고 아무리 난리를 쳐도 제대로 범인을 잡아내는 건 못 봤다. 그러니 어쩌겠나. 화장실도 참은 채 도시락을 사수할 수밖에.
 
   그 시절 이 친구가 내 도시락을 먹은 적이 있단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그 친구 말이, 그날따라 내 도시락에 계란후라이가 얹어져 있었는데 그리 맛있더란다. 그런데 빈 도시락을 발견한 내가 서럽게도 펑펑 소리 내서 울더란다. “나도 계란후라이 얹은 도시락 처음 먹어 보는 건데.”라면서 말이다. 그 친구는 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너무너무 미안했단다. 
 
   이후,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야채 장사를 하면서 조금 형편이 나아졌다. 그렇게 번 돈으로 처음 한 일이 고아원에 매달 쌀을 보내는 일이었단다. 그렇게나마 미안함을 달랜 거다. 그런데도 계란후라이만 보면 나의 울음소리가 늘 마음에 걸리더란다. 그러니 꼭 한 번만 내게 밥 사줄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단다. 그러다 나를 만났으니, 하느님께서 40년 묵은 그 미안함을 용서받을 기회를 주신 거다. 그렇게 나는 친구가 사주는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계란후라이도 두 개. 배 두드리고 나오는데 그 친구 손가락의 묵주반지 속 아부지가 활짝 웃으시더라. 
호수 제목 글쓴이
2903호 2025. 12. 21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윤석인 로사 
2902호 2025. 12. 14  ‘자선’, 우리에게 오실 예수님의 가르침 원성현 스테파노 
2901호 2025. 12. 7  “이주사목에 대한 교회적 관심을 새롭게” 차광준 신부 
2899호 2025. 11. 23  임마누엘, 나와 함께 하시는 이예은 그라시아 
2897호 2025. 11. 9  2025년 부산교구 평신도의 날 행사에 초대합니다. 추승학 베드로 
2896호 2025. 11. 2  나를 돌아보게 한 눈빛 김경란 안나 
2895호 2025. 10. 26  삶의 전환점에서 소중한 만남 김지수 프리실라 
2893호 2025. 10. 12  우리는 선교사입니다. 정성호 신부 
2892호 2025. 10. 6  생손앓이 박선정 헬레나 
2891호 2025. 10. 5  시련의 터널에서 희망으로! 차재연 마리아 
2890호 2025. 9. 28  사랑은 거저 주는 것입니다. 김동섭 바오로 
2889호 2025. 9. 21  착한 이의 불행, 신앙의 대답 손숙경 프란치스카 로마나 
2888호 2025. 9. 14  순교자의 십자가 우세민 윤일요한 
2887호 2025. 9. 7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권오성 아우구스티노 
2886호 2025. 8. 31  희년과 축성 생활의 해 김길자 베네딕다 수녀 
2885호 2025. 8. 24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탁은수 베드로 
2884호 2025. 8. 17  ‘옛날 옛적에’ 박신자 여호수아 수녀 
2883호 2025. 8. 15  허리띠로 전하는 사랑의 증표 박시현 가브리엘라 
2882호 2025. 8. 10  넘어진 자리에서 시작된 기도 조규옥 데레사 
2881호 2025. 8. 3  십자가 조정현 글리체리아 
주보표지 강론 누룩 교구소식 한마음한몸 열두광주리 특집 알림 교회의언어 이달의도서 읽고보고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