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 2606호 2020.0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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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현주 라파엘라 |
한 끼의 힘
현주 라파엘라 / 구포성당, 수필가 rubia522@hanmail.net
퇴근 후 쉬고 싶은 마음을 잠시 미루고 서둘러 식사 준비를 한다. 따뜻한 밥에 한두 가지 반찬이 전부인 온전히 나를 위한 밥상이다. 일 때문에 바쁜 식구들은 얼굴 보기도 힘들다. 혼자서 대충 먹는 날이 많다 보니 집 안의 온기마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맛있다는 느낌을 생각하면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떠오른다. 힘겨운 일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온 주인공 혜원이 보내는 특별한 사계절 이야기다. 엄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즐겁게 음식을 만들고 친구들과 나눠 먹는 장면이 대부분이지만 지루하지 않다. 행복은 잘 쉬고 잘 먹는 것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쉬고 싶을 때 어디론가 떠나는 것은 어렵지만 잘 챙겨 먹는 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하루 수고한 나를 위해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밥심은 원래 밥힘에서 굳어진 말이라고는 하나, 밥에 담긴 마음을 생각하고 힘내라는 뜻으로 밥심이라 부르게 된 것은 아닐까. 쌀 한 톨은 미약해 보이나 튼실하게 길러낸 농부의 정성과 인내의 시간이 담겨 있기에 그 힘은 오늘을 지탱하는 뿌리가 되어 든든하다.
믿음을 키우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도 농부 같은 마음과 자세라는 생각이 든다. 내 안에 심어진 믿음의 싹이 잘 자라기를 원하지만 아직도 감사의 기도보다는 떼쓰는 아이처럼 기도할 때가 더 많다. 혹시 믿음의 싹이 말라버리지 않을까, 쭉정이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도 그 순간뿐이다. 오늘 하루 어떤 정성을 기울였는지 되짚어 보면 밥그릇 앞에서 부끄러워진다.
갓 지은 밥을 저으면서 가족들이 잘 챙겨 먹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보살펴달라는 기도를 한다. 끼니를 때울 때는 금방 허기지고 걱정할 일이 많았는데 따뜻하게 한 끼를 챙겨 먹으니 뱃속이 든든하고 막막했던 일들도 풀리는 것 같다. 내 손으로 직접 차려주지는 못해도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을 밥에 가득 담아둔다.
오랜만에 장을 보러 나섰다. 코로나19의 여파로 판로가 막혀 힘들어진 농가에 대한 뉴스가 생각났다. 내가 소비하는 정도의 소량으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겠지만 몇 가지 채소를 더 샀다. 다른 이에게도 한 끼의 힘이 전해지길 바라며 오늘도 행복하게 밥상을 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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