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 2597호 2020.0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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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선정 헬레나 |
다 계획이 있으셨구나
박선정 헬레나 / 남천성당, 인문학당 달리 소장
“정아야~ 탁배기 한 되 받아오이라!” 40년도 더 전이다. 낮 동안 고된 농사일을 하고, 굳을 대로 굳은 등줄기를 딱딱한 방바닥에 누일 시간이 되면 할아버지는 종종 탁주 생각이 났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저렇게 막내손녀를 불렀다. ‘우쒸! 오빠야도 있고 언니야도 있건만, 왜 꼭 나한테만 시키냐고요!!’
그래도 우야겠노. 가야지. 우리 먹일라꼬 종일 논에서 고생하고 온 할배가 시키는데. 그렇게 대여섯 살의 나는 노란 주전자 하나 들고 꾸역꾸역 대문을 나섰다. 언니야라도 따라가 주는 날엔 일개 호위무사들이라도 이끈 공주의 기세였건만, 불행히도 언냐오빠야는 자는 척 아픈 척 심지어 죽은 척, 정말 죽어라고 안 따라갔다. 자기들한테는 무섭기만 하던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동생에 대한 일종의 통쾌한 복수였으리라. 그런데 할아버지는 왜 하필 막내 손주인 어린 나에게 탁주 심부름을 시켰을까.
탁주집은 마을 중간쯤에 있었다. 뛰어도 족히 십 분은 되는 거리였다. 문제는 그 집에 가려면 반드시 우리 마을 당산나무를 지나야 한다는 데 있었다. 휘감싼 알록달록 천조각이 바람에 흔들거리며 춤추는 그 당산나무 아래를, 그것도 어두컴컴한 밤중에 지나야 한다는 건 한 마디로 죽음이었다. 지금처럼 가로등도 없었다. 유일하게 어둠을 밝힌 건 달과 별, 그리고 반짝이는 내 두 눈뿐이었다. 하긴, 밤중 심부름 덕분인지 지금도 나는 유달리 밤눈이 밝다.
게다가 그렇게 한 번, 두 번 다니다 보니 어느새 담력이라는 게 생겼다. 똑바로 쳐다보니, 세상천지 뭐 그리 무서울 게 없었다. 오히려 내 발아래 구덩이 하나, 돌부리 하나, 지나가는 뱀 한 마리를 조심해야 한다는 걸 몸으로 터득했다. 그렇게 밤중 탁주 심부름을 하면서 나는 언니 오빠보다 훨씬 당당하고 용감해졌다. 그것이었을까. 할아버지가 굳이 제일 어린 나를 부른 이유가? 험하고 무서운 세상, 두 눈 부릅뜨고 지혜롭고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그러니, 할아버지에게는 다 계획이 있으셨던 것이다.
다들 참 많이 힘들었다. 전 세계가 아직도 많이 아프다.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나’도 참 힘들다. 이럴 때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왜 하필 저에게 이러십니까”라고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어두운 밤길을 걸어 찢어진 천들이 귀신처럼 춤을 추는 당산나무 아래를 지나서 (탁주 대신) 묵주를 구해 오라고 시키신다. “왜 그러셔요, 아부지.”
그런데 말이다. 하느님은 다 계획이 있으신 것이다. 그러니 믿고 용기 내어 잘 지나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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