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말하자면, 메시아에 대한 선입견을 가졌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 주님께서 몸소 설명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선입견에 가려졌던 제자들의 눈이 어떻게 열리고, 어떤 계기를 통하여 제자들이 부활하신 분을 알아차리는지? 이에 대해 오늘 복음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이 함께’하셔야 가려졌던 눈이 열릴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복음은 동네에 다다랐을 때에, 제자들이 주님께 드리는 간청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이런 간청에 따라 주님은 실망으로 가득 차 있는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주님은 놀랍게도 식탁에 앉아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십니다. 빵을 떼어 나누어 주는 일은 손님을 초대한 주인이 해야 할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초대받은 손님이었지만 주인의 봉사를 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봉사하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여기에서도 하느님의 개입은 손님으로서 마땅한 존경과 환대를 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봉사해야 할 제자들이 오히려 거꾸로 예수님에게서 봉사를 받는 순간 이제 그들의 가려졌던 눈이 열었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봉사를 하시는 예수님에게서 그들은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메시아는 섬김을 받으러 영광과 권능으로 오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기 위하여 비천한 모습으로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깨달으면서, 바로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절망과 낙담으로 치달았던 그들의 삶이 희망과 용기로 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잊고 고향에서 살기로 작정했던 제자들은, 당신을 낮추시는 하느님의 개입으로 엠마오를 떠나 당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 즉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장소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돌아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개입으로 선입견을 버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깨달은 제자들은 주님의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은, ‘제자들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는데 사라지셨다’는 내용입니다. 주님을 알아 뵙는 순간 제자들은 그 주님을 붙잡아 두고 싶은 인간적 충동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를테면, 제자들은 주님을 어떤 일정한 모습으로 고정하고 싶은 충동, 또다시 주님을 인간의 측면에서 생각하려는 선입견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또다시 주님에 대한 선입견에 직면하려는 순간, 주님께서는 그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사라져 버립니다. 선입견은 고정된 생각입니다. 그 어떤 것을 고정된 틀에 가두고 그 틀 안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일정한 인간적 틀에 가두어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과 늘 함께 살았음에도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틀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어도 깨달을 수 없었고, 낙담과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일정한 틀에 고정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런 충동에 또다시 사로잡히는 순간 사라져 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어야함을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느낀 점을 우리들도 마음 속에 간직을 해야 부활 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늘 말씀을 생활화하고 사시는 분들은 주님께서 우리들 마음을 “타오르게” 하십니다. “타오름”은 우리를 열정적으로 살게 하는 모습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늘 말씀과 성찬의 식탁에서 우리들과 함께 있으십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역동적인 것이기에 주님과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신앙인다운 역동성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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