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6일 성주간 수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지난 월요일부터 미사 때마다 들어왔던 복음은 이중적이고, 양면적인 유다를 고발하고 있다. 유다의 악행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그의 비참한 말로까지도 상세하게 알려준다. 그런데, 왜 복음은 그렇게까지 유독 유다의 말과 행동들을 다른 제자들보다도 더 상세하게 보도할까 ? 유다의 배신이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가장 직접적인 이유였음을 알리기 위함이었을까 ?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퍼지는 곳마다 유다라면 치를 떨게 하고, 유다를 영원한 증오와 적개심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해서일까 ?
그런 이유 때문에 복음사가들이 유다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더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정의를 세우고, 평화를 지키며, 사랑하고, 희망하며, 생명을 돌보고, 자유를 누리라고 가르치지만, 증오나 적개심은 멀리하라고 가르친다. 유다의 배신과 제자들의 배반을 복음이 상세하게 다루는 것은 그 제자들의 모습이 비단 제자들만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도 그러한 배신과 배반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베드로도 될 수 있고, 유다도 될 수 있는 우리다. 큰소리 떵떵 쳐놓고, 실제로는 뒷꽁무니로 빠져버린 베드로, 기대와 희망을 저버렸다고, 눈길 돌리고, 마음 접어버리며 급기야 사랑했던 사람마저도 배신하고, 그를 죽음의 길로 내쳐버리는 유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관심도 없이 그저 방관자로만 머물러 있다가 자기에게 손해가 끼칠 징조가 보이면, 언제라도 도망가 버리는 나머지 제자들, 그들의 모습들이 바로 우리들의 내면에 있는 우리들의 또다른 모습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셨을 때, 그 십자가 아래를 지키던 이들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또 다른 마리아, 그리고 예수의 사랑 받던 제자뿐이었다. 똑똑하고, 빠릿빠릿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큰소리 뻥뻥 쳐대던 사람들도 아니었다. 어중이 떠중이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은 겸손한 이들이었다.
십자가의 길에서 내가 만약 거기 예루살렘에 있었다면, 나는 어디에 있을까 ? 예수를 조롱하던 로마 군인들 틈에 ? 예수에게 침을 뱉고, 욕하고 손가락질하던 군중 틈에 ? 십자가를 지고 가던 피 흘리는 예수를 보며 눈물 짓는 여인들 틈에 ? 예수의 얼굴을 닦아주던 베로니카 옆에 ? 예수와 함께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던 그 겸손한 이들 옆에 ? 나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