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마태오 13, 1-23/ 연중 제15주일(농민주일)

오늘 우리가 함께 들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이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성장하고 열매 맺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 또는 신앙을 씨앗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느님 말씀을 뿌려놓으시고 신앙을 뿌려놓으십니다. 그러나 씨앗으로 뿌려놓으십니다. 씨앗은 결과물이 아닙니다. 씨앗이 곧바로 열매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씨앗이 의미하는 것은 시간을 두고 자라나서 열매가 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과정이 필요합니다.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은 단지 시간만 채워서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햇볕도 받아야 하고, 때로는 어둠 속을 홀로 지내기도 해야 하며, 또 어떤 경우에는 찬바람과 맞서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씨앗은 싹을 틔우고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습니다. 신앙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씨앗을 뿌려주셨지만,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시간도 필요하고 과정도 필요합니다. 예비자 교리를 6개월이나 하고 나서 세례를 주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나치게 결과에 집착하면서 과정을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이 빠른 시간 안에 어떤 결과물을 가져다주거나, 기도가 하루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라서는 안됩니다. 하느님 말씀은 우리 안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서 키워나가기 위해서, 신앙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좋은 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시며,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한 사람에게 하느님 말씀은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쉽게 타협하는 사람은 하느님 말씀의 숨을 막아놓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이나 좋은 땅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의 상태를 뜻할 수도 있고, 또는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단계나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길가는 우리 영혼의 첫 단계를 뜻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지긋하게 머무르지 못하여 온갖 잡념과 생각들이 하느님 말씀이 영혼 안에 스며드는 것을 방해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바위틈과도 같아서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끈기가 없어서 말씀이 영혼 깊은 곳까지 이르지 못하기도 합니다. 가시덤불은 우리의 온갖 어려움과 상처를 상징합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인생의 온갖 어려움과 시련이 하느님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합니다. 고통과 절망 앞에서 우리의 영혼이 참고 기다리지 못하면 하느님 말씀은 쉽게 숨이 막혀 버립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떨어진 말씀은 크고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처음부터 좋은 땅은 없고, 처음부터 좋은 열매를 맺을 씨앗도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길과 바위틈의 단계를 이겨내고, 또 가시덤불의 시련을 거치면, 좋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우리에게 씨앗으로 주어집니다. 처음부터 열매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씨앗을 열매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씨앗을 잘 성장시킬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의 양식을 주시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철부지에게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시니

마태오 11, 25-30/ 2023. 7. 9. 연중 제14주일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말씀으로 당신의 공적 생활을 시작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구약성경의 영향을 받은 단어입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예수님은 지상 천국을 건설하거나 천년왕국을 세우시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 나라를 하느님의 구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율법 속에 감추어진 것도 아니고, 죽어서야 갈 수 있는 곳도 아니며, 머나먼 미래 속에 있는 것도 아님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구원은 예수님과 더불어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시작된 현실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고,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을 당신의 기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은 기적 그 자체보다는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알리는 상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 하느님의 능력과 권능이 기적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열번에 걸쳐 나병 환자를 고치시고, 호수의 풍랑을 가라앉히시며, 마귀를 쫓아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 등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마음이 완고하여 자기 생각대로만 살고, 자기 살던대로만 살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혜와 슬기를 가졌다고 여겨지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박하고 가난하며 욕심없는 이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받아들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신비는 철부지들에게, 철부지와 같은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신비입니다. 복음서가 표현하는 철부지, 어린 아이, 가난한 사람은 철이 안든 사람, 나이 어린 사람,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느님말고는 아무것에도 의지할 수도 없고, 의지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바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알고 깨닫게 되는 것은 세상의 지식과 지혜와는 다릅니다. 세상의 지식과 지혜는 쉽사리 권력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근대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은 힘이다하고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그런 지혜가 아니며, 오로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이들에게만 드러나는 신비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대한 지혜는 권력이 아니라 참된 안식을 가져다 줍니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평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샘솟는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의 신비를 보고 듣고 알며 깨달은 사람은 새로운 기쁨과 평화와 위안을 얻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철부지요 어린 아이이며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오늘 주님의 말씀 새겨 들으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교황주일, 베드로 사도의 직무 묵상

지난 주에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지냈고, 그날과 가장 가까운 주일인 오늘 교회는 교황주일로 보냅니다. 오늘 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과 교회를 위해 특별히 기도합니다. 오늘 교회의 최고 목자인 교황님과 그 직무에 대해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우리는 2주 전에 열두 사도들을 뽑으시는 대목의 마태오 복음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그 때의 묵상을 잠시 되살리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으시며 그들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열두 사도를 통하여 교회를 건설하기를 의도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사도행전에서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베드로 사도가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며 마티아 사도를 뽑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 받게 해 주십시오(사도 1, 24-25).” 베드로 사도와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의 자리에 마티아를 뽑아 유다의 직무를 계승하고 열두 사도의 자리를 채우게 했습니다. 열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며, 온 세상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열두 사도를 통하여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제일 앞자리에 베드로를 세우셨습니다.

또한 마태오 복음을 보면, 베드로는 가장 먼저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신앙고백했던 사도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복음에서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번에 걸쳐서 내 양을 돌보아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사도들의 으뜸으로 삼으셨습니다. 사도들 가운데 으뜸이라는 이 특별한 지위는 초대 교회 안에서도 명백히 확인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유다인이 아닌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 유다인의 관습을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따르지 않아도 되는지에 대해 논쟁이 일어납니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를 예루살렘의 베드로 사도에게 파견하여 이 문제를 논의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느님의 구원은 유다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 민족에게 주어지고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 것이라는 취지의 연설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 사도들이 모여 회의를 할 때에도 베드로 사도의 특별한 지위를 모두가 존중하였습니다.

이후에 베드로 사도는 당시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다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다른 지역의 교회들은 로마 주교의 으뜸의 지위를 존중하였고, 자기 지역 교회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로마 주교에게 의사를 타진해 왔습니다. 로마 교회의 주교의 권위는 바로 사도 베드로의 직무에서 나오는 권위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사도들 가운데 으뜸이었듯이,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로마 주교가 다른 모든 주교들 가운데 으뜸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지역의 교회가 로마 교회와 일치하여 있다는 것은 교회 전체와 일치해 있다는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로마의 주교인 교황은 전 세계 가톨릭 신자의 일치의 상징이며, 신앙의 스승입니다.

한 때, 중세의 어느 시기에 교황의 권력이 세속을 압도했을 때, 교황이 자신의 베드로 직무보다는 세속적 이익을 탐하며 살기도 했습니다. 교황과 교회가 부패하고 무너지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세번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충실히 주님을 따랐듯이 오늘의 교회는 예전의 잘못에서 벗어나 충실히 신앙을 전파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역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살아가며, 교회에 대해 실망할 수도 있고, 교회의 약함과 결점들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번이나 배반했던 사람입니다. 약점과 결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베드로의 약점과 결점은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베드로의 약점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직무는 소중한 것이며, 우리들의 약점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일치를 이룰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서로의 약점과 결점을 보완하고, 서로 사랑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를 비판하기 보다는 교회를 더 사랑할 수 있도록, 교황에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사도적 직무를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더욱 거룩해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과 기도를 모아,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화해와 일치

마태오 18,19-22/ 2023. 6. 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오늘은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73년째 되는 날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서,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불신과 미움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았고, 또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고, 가족과 헤어지며, 전쟁의 공포가 트라우마로 남아있습니다. 바로 이 날 한국천주교회는 이러한 미움과 공포, 불신과 아픔의 트라우마를 사랑과 용서로 승화시키도록 특별히 기도합니다. 따라서 오늘 교회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에, 미사 독서와 복음은 참다운 용서와 화해에 대해 묵상하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묵상할 것은 용서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우리 자신들에게 잘못한 사람을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일흔일곱 번은 실상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과는 달리 실제로 우리 나약한 인간에게 용서는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내 마음 편하기 위해서라도 용서하고 싶지만, 용서는 참으로 힘든 일이고,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도움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용서에 대해 가르치기 전에, 기도에 대해 먼저 가르치는 것입니다. 정말로 마음을 모아 주님께 기도할 때에, 주님의 힘을 받아야만이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참으로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용서에 대해 묵상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하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내 자신이 용서의 주체, 즉 용서를 베풀어야 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그 사람,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그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우리 고민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 우리가 용서받은 것처럼 서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이미 누군가에게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실상 우리 모두는 누구나 용서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내 부모님께 용서받으며 살아왔고, 내 배우자와 가족들에게 용서받으며 살아갑니다.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약성경의 시편이,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리이까하고 노래하듯, 주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따지고 든다면, 주님 앞에 온전히 서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우리의 이웃에게 그리고 하느님께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인생 안에서도 온갖 전쟁을 체험합니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우리는 이웃과 전쟁할 뿐 아니라 나 자신과도 전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오롯이 내가 다 받아 안고 살아갑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건 사실 사는 게 아닙니다.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로이 살아가는게 진짜 사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받고 사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기도하며 이웃과 화해할 수 있기를 빕니다. 오늘 하느님의 용서와 위로, 주님의 평화와 사랑이 우리 신자 모두의 마음 안에서 자라나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열 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보내시다

마태오 9, 36-10, 8/ 2023. 6. 18. 연중 제11주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열 두 사람을 불러 제자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어 파견하십니다. 오늘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파견하신 의미에 대해 함께 묵상합시다.

첫째로 열 둘의 의미입니다. 마태오 복음을 보면 이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을 먼저 부르셨습니다. 어부들이었던 이들에게 사람낚는 어부로 만들겠다하시며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포함해서 열 둘을 뽑으십니다. 요한 복음을 뺀 세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의 이름이 나와 있는데 모두가 열 둘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난 유다 이스카리옷의 자리를 마티아가 채웁니다. 열 둘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시고 계획하신 숫자이고 이를 제자들이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왜 열 둘에 의미를 부여하셨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열 둘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온 세상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뽑으심으로써 새로운 이스라엘이요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려고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열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원하신 교회의 모습이요 또한 예수님께 불린 제자로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열 두 명의 면면을 살펴보면 각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직업으로는 어부도 있고 세금을 거두는 세리도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로마에 적대적인 열혈당원도 있고 로마에 친화적인 세리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른 사람도 있지만, 예수님을 단돈 몇 푼에 팔아 넘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모으시고자 하셨습니다. 다양한 직업과 다양한 정치적 성향, 다양한 사람을 모아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역시 다양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나이도 직업도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정치적 성향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를 불러 주신 분은 주님이시고, 주님이 우리의 다양성을 훼손하지 않고서 오히려 그 다양성을 통해서 일치를 이루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나와 다르다는 것이 우리의 일치를 방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서 한 몸이고 하나입니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게 하셨습니다. 이 일들은 사실 주님께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무엇보다 먼저 제자들에게 머물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제자들은 치유자가 되기 전에 치유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헛된 것을 쫓아가는 마음에서 해방시켜 주셨으며, 아프고 병든 마음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당신 곁에 가까이 불러 머물게 했습니다. 주님의 힘이 그들의 힘이 되고 주님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이 되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 역시 주님 곁에서, 주님 가까이에서 우리의 마음이 치유되고 온갖 나쁜 마음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행하신 일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루어진 일들을 세상 속에서 행하도록 명하십니다. 우리가 받은 평화와 위로를, 우리가 얻은 용서와 치유가 온 세상 모든 사람들과 만물들에게 베풀라는 명령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또 그들을 파견하십니다. 열 두 제자는 바로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이자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가 각자 다른 사람이지만 서로가 이해하며 하나가되도록 주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서 평화와 위로를 얻고 그것을 세상 속에 전하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온 세상 모든 만물이 주님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주님 안에서 평화를 얻고 주님을 통해 용기를 얻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성체를 통한 하느님과의 만남

요한 6, 51-58/ 2023. 6. 11.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우리는 친한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고, 술도 나누어 마시며, 커피도 한잔 합니다. 당연히 우리들의 식사와 술자리는 단순히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니요 목마름을 축이기 위해서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상대방을 좀 더 새롭게 만나고 새롭고도 더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 생각과 삶을 나누게 됩니다. 그러기에 격식과 예의만 차리다 끝나버리는 식사만큼 불편한 것은 없습니다. 삶을 나눌 수 없는 식사 자리는 인간적이지도 못하고 메마르고 불행한 자리가 됩니다.

복음서 여러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과 식사를 하셨습니다. 루카 복음을 보면, 사회 지도층 사람들은 예수님을 먹보요 술보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창녀와 세리들과 어울린다고 비난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들을 새롭게 만나기를 원하셨고 새로운 관계를 맺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의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식사는 일상의 식사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러하겠지만, 마지막을 의식하고 하는 말과 행동은 특별한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가르치고 행동해온 모든 것을 총괄적으로 보여주십니다. 한편으로는 당신의 철저한 희생이고, 다른 편으로는 그분의 희생으로 얻는 새로운 생명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를 당신의 생명을 나누는 자리요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자리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나누어 주시는 빵을 세상 사람들을 위해 죽어야 할 당신의 몸으로 이해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포도주를 세상 사람들을 위해 쏟아야 할 당신의 피로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식사를 당신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절정의 순간이며 하느님과 맺는 새로운 계약의 완성으로 생각하셨습니다. 나눔의 절정, 관계의 완성은 바로 자기를 희생하여 이루는 사랑입니다. 바로 이 사랑으로 세상 사람들과 예수님의 새로운 깊은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는 관계입니다. 이 피로 하느님과 새로운 이스라엘의 계약이 이루어집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 하느님과의 새로운 계약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줍니다. 그리스도의 생명, 부활의 생명을 줍니다. 이 생명은 매일 먹는 밥이나 빵으로 살아가는 생명이 아닙니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장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그리스도 역시 그 사람 안에 머물게 됩니다. 성체 성사를 통해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 있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도 서로의 건강을 기원하며 잔을 들 것이며, 서로의 사랑을 나누며 음식을 먹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식탁은 더 깊은 만남과 더 새로운 관계를 지향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만찬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 만찬에서 하느님과 더 깊은 만남과 더욱 새로운 관계가 맺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과의 만찬 안에서 너희도 이를 행하라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세상 사람을 위해 주님처럼 자신을 내놓을 결심을 할 것입니다. 이 만찬 안에서 우리는 내가 마실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하신 주님의 질문을 매일 매일 새롭게 새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이 질문에 이렇게 응답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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