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과 걸림돌 사이에서

오늘은 교회의 두 기둥이신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를 이끌었고,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교회의 중심이고 일치의 상징이라면, 바오로 사도는 복음 전파의 상징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신앙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시고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실상 그리스 말의 페트로스는 바위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시몬 바르요나를 교회의 초석이자 주춧돌로 삼으시겠다는 의미로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듣고,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지만, 실상 베드로는 흠도 많고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와 있지 않지만 오늘 복음의 다음 구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주 인간적인 관점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조금 전 반석이자 주춧돌이라는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았으나, 곧바로 예수님께 걸림돌이라는 책망을 받습니다.

실상 베드로는 반석과 걸림돌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앙 고백과 인간적 면모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배운 것 없는 어부 출신에다 우유부단했고, 요즘 말로 하자면 강력한 리더십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체포되고 재판을 받으실 때, 그는 세 번에 걸쳐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합니다. 그러나 그는 후회하고 회개하며 돌아설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잘못 디딘 발걸음에서 되돌아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약한 사람이었지만, 주님께서 가장 강한 디딤돌로 만들어 주셨고, 그는 그렇게 교회의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신앙과 인간적 모습 사이, 반석과 걸림돌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역시 신앙의 요구와 우리 자신의 인간적 요구 사이에서 흔들리고 방황합니다. 더 나가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교회의 약하고 흠 많은 모습을 봅니다. 어떻게 교회가 이럴 수 있을까, 어떻게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약하고 흠 많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웠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약하고 흠 많은 우리 위에 교회를 세우셨고, 그 약점과 단점은 고스란히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는 말은, 베드로의 신앙과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신앙고백 위에 세우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가장 먼저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고, 그 신앙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실상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베드로가 보여 주었듯이, 회개하고 돌아설 수 있는 능력, 잘못 디딘 발걸음에서 되돌아 올 수 있는 용기,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입니다.

오늘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에 우리 교회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우리 역시 우리가 세례 때 고백한 신앙고백에 충실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우리 교황 레오 14세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모아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와의 만남

복음서들을 읽어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온 삶에 함께 동반하시고 현존하십니다. 길을 걸어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시고,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제자들 곁에 함께 계십니다. 두려움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 있을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가장 뚜렷하고도 확실하게 만난 때는 빵을 떼어 나눌 때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 곁에 계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빵을 떼어 나누는 일에 초대하십니다. “빵을 떼어 나누는 것이야말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빵을 떼어 나누는 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증언하듯이, 성목요일밤 주님의 최후 만찬을 계속해서 재현하는 것입니다. 이 최후 만찬이 바로 예수님의 피로 하느님과 우리가 새롭게 맺는 계약이며,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시면서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전하고 주님의 부활을 선포합니다. 성체와 성혈을 통해 우리는 구원의 은총을 지금 여기서부터 받는 것입니다. 실상 성체성사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자 정점이고, 미사야말로 교회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사에 참여한다고 해서 곧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 구원의 은총을 뼈저리게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는 마술도 아니고 주술도 아니며, 더구나 자동판매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미사에 참여한다고 내가 바라고 원하는 일들이 한순간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체를 영한다고 해서 은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미사에 기계적으로 형식적으로 참여할 때, 우리의 영혼은 자라지 못합니다. 내 삶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미사 참여는 그 자체로 무의미합니다.

우리가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준비되고 예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은총의 품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미사 역시 준비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날 독서와 복음은 여러 차례 읽어보아야 합니다. 여러 번 읽으면 더 잘 들립니다.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묵상해야 합니다. 더 나가서 미사 중에 사제가 하는 말 역시 잘 들어야 합니다. 미사 경본은 거의 성경 구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미사 경문을 통해서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침묵할 때는 침묵하고 묵상할 때는 묵상해야 합니다. 미사 중에 우리는 말씀의 전례가 마무리될 때 그리고 영성체 후에는 침묵 속에서 묵상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을 영하고 나서 우리는 침묵 속에 주님과 대화해야 합니다.

말라빠진 꽃에게는 햇볕도 소용이 없습니다. 땅이 자갈 투성이이면 물을 주어도 헛수고입니다. 그러나 싱싱한 식물은 햇볕을 쪼일 때 더욱 튼튼해집니다. 기름진 땅은 빗물을 머금어 씨앗을 싹 틔어 자라게 합니다. 세상의 어떤 존재도 혼자서 사는 것은 없습니다. 만물이 만남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만남을 참으로 받아들일 때, 그 만남에서 우정이 싹트고 사랑이 자라납니다.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만남 속에서 삼라만상이 자라고 꽃피고 열매맺습니다. 성체성사와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만남의 자리입니다. 이 만남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자라고 주님의 은총이 우리 위에 내립니다. 준비되고 예비된 만남이 우리를 성장시켜 줍니다. 오늘 성체와 성혈의 은총이 우리 위에 내리기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깊은 본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우리에게 체험되지만 실상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인간의 머리로 온전히 납득되기 힘들고, 인간의 말로 다 표현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신비는 머리로 납득되기 이전에, 우리가 체험하고 느끼며, 그럼으로써 깨닫게 되는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신학과 교리 이전에, 사도들이 체험하고 깨달은 신비입니다. 그래서 이 신비를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사도들의 체험과 깨달음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도들에게도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하느님은 멀리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불러도 대답이 없으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인간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고 느끼고 체험했습니다. 사도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영에 충만하신 분이셨고, 그분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그분의 행동 하나 하나가 모두 하느님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지금 내 곁에 계신다면 어떤 모습일까? 이 질문에 사도들은 주저 없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답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 위한 그분의 죽음, 그리고 믿기 힘든 그분의 부활을 목격하면서 사도들은 예수님 그분이 바로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당신의 영이 자신들 존재 깊은 곳에 계심을 느끼고 체험하고 깨닫게 됩니다. 성령은 바로 우리 안의 하느님입니다.

사도들은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모든 것의 기원이자 종착점이신 분이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심을, 그리고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이심을 체험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세 위격의 하느님이 실상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깨달음이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너머에 계시는 분이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며,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삼위일체가 하느님의 본성에 관한 신비이지만, 인간이 느끼고 체험하면서 깨닫게 되는 신비라는 측면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는 인간에 관한 신비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너머에 계시다는 말은 우리 존재의 시작과 마침 너머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의 삶을 마치더라도 하느님의 영원의 품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서의 삶을 영원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으며, 지상의 삶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치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존재 너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지해서 살아가며 그 미래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감싸여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 자신의 인생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음을 깨닫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존재 안에 계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을 때, 우리의 상처가 낫게 되고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참다운 모습으로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 존재 가장 깊은 곳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하느님 본성에 관한 가장 깊은 신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신비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도 말해줍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지금 우리의 삶 그리고 미래의 우리의 삶 모두가 영원하신 하느님의 은총과 신비 안에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오늘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묵상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숨을 불어넣으며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이후 3일째에 부활하시고, 40일이 지난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10일이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50일이 되시는 날, 유다인들의 오순절 축제일에 성령께서 제자들 위에 내려오십니다.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은 바로 이 사건을 기념합니다. 이 사건은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이전에 성령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내려오심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에 대해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숨”, “예수님의 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은 언제나 생명을 뜻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숨을 불어넣으시자, 그 흙이 생명을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숨결은 세상 만물을 태어나게 하고 세상 만물이 생명을 갖게 합니다. 세상이 참으로 살아있게 만들어 줍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생명의 하느님이시고 죽음을 이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의 시편도 노래합니다. “당신이 그들의 숨을 거두시면, 죽어서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당신이 숨을 보내시면 그들은 창조되고, 온 누리의 얼굴이 새로워 지나이다.” 특히나 인간은 하느님의 숨으로 살아갑니다. 단지 생물학적인 생명 이상으로 살아갑니다.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하느님의 숨결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기 속에 있는 하느님의 숨을 깨달을 때, 참으로 인간답게 그리고 하느님답게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성령을 받아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숨역시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생명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자, 제자들은 새로 태어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유대인들이 두려워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이, 주님의 숨을 받고서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섭니다. 불신을 떨치고 믿음의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절망을 떨치고 희망으로 나가게 됩니다. 과거에서 해방되어 미래를 향하게 됩니다. 참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사랑과 기쁨과 평화 안에 머무르고, 인내와 절제의 능력을 갖게 되며, 선의와 온유로서 이웃을 대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숨, 예수님의 숨은 거센 바람처럼 휘몰아 치고, 불꽃 모양으로 제자들 위에 내립니다. 성령의 언제나 창조하시는 영이시며 생명의 영입니다. 제자들 위에 내린 영은 교회를 창조하고 교회에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성 목요일 밤의 최후의 만찬이나 성 금요일 십자가 위의 예수님이 흘리신 피와 물 역시 교회의 탄생을 뜻하긴 하지만, 가장 구체적으로 제자들 위에 내리신 성령께서 교회를 창조하시고 교회에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니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이야말로 교회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성령께서는 언어가 다르고 지역으로 나누어지며 마음이 갈라선 사람들을 넘어서서 한 목소리로 하느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게 하십니다. 서로 나누어지고 갈라진 마음이 하나로 모이고 뭉칠 수 있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 하느님 뜻대로 살 수 있게 해주십니다. 하느님의 숨, 예수님의 숨,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새롭게 살게 하시고, 교회를 새롭게 하시며, 온 누리를 새롭게 해주십니다.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에 하느님의 숨, 예수님의 숨으로 우리가 새로운 숨을 쉬게 하시고, 성령께서 우리 위에 내리시어 우리를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오늘은 주님의 승천 대축일입니다. 승천은 말마디 그대도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뜻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40일 이후에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오르셨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을 예수님이 지상을 떠나 지구 대기권을 넘어 우주의 어떤 공간 속으로 가신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이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고 전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고, 사람들의 눈에서 숨어 버렸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숨어 계시는 하느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님 승천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는 말은 예수님은 인간의 눈과 귀, 인간의 경험과 지혜 너머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보이는 것을 넘어서 계시고,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 너머에 계십니다. 주님은 보여지는 것들을 통해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이루어 놓은 것, 내가 쌓아 올린 것을 통해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고 좀 더 해방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영적인 눈,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눈, 달리 말하자면 영적인 깨달음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이제 우리 위에 성령이 내려오시면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게 되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숨어 계시는 분이라는 신비를 묵상해보면, 주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중에도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면서도 그것을 본 사람들에게 함구하라고 명하십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여지는 방식으로 그리고 당신을 드러내는 식으로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쉽게, 이 혼돈의 세상에서 하느님은 왜 드러나시지 않는가? 이 불의한 세상에서 하느님은 왜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지 못하는가? 하고 묻습니다. 이런 질문은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전쟁과 폭력, 온갖 죄와 악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멸망하지 않는 것은 숨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나 조용히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숨어서 일하시는 주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저의 부족함이나 불찰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또한 사제로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오로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관용 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역시 자기 인생에서 이루어 낸 성과와 성취 역시 조용히 기도하는 분들의 덕분임을 우리 인생에서 깨달어야 합니다. 실상 가장 위대한 성인들은 조용히 숨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의 가장 깊은 곳, 어쩌면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숨어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떠서 우리 안에 숨어 계시는 주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오늘부터 다음주까지 성령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도록 간절히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사도회의

주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첫 성령강림 이후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초대 교회를 건설하게 됩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가 역사적으로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야고보 사도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바오로 사도는 바르나바와 더불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유다인이 아닌 이방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됩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활동을 기록한 <사도행전>을 보면, 그리스도교가 처음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 같지만, 실상 여러가지 어려움 앞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모교회는 유다인들의 박해에 직면했습니다. 봉사자 스테파노가 순교하였고, 야고보 사도 역시 순교합니다. 베드로 사도도 옥에 갇힙니다. 반면에 안티오키아 교회에서는 유다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를 놓고 다툼이 생깁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유다인들이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하고 주장합니다. 이 때문에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는 예루살렘으로 찾아와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다른 사도들과 함께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됩니다.

이 사도회의의 결과는,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민족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유다인들의 율법과 전통은 복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다인 아닌 다른 민족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때, 모세의 율법과 관습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이러한 결정사항을 편지로 적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 편으로 안티오키아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의 말미에 보면,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를 멀리하라고 적혀 있습니다. 할례를 비롯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결정했으면서도 마지막에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지 말라는 모세의 율법 조항을 지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항이 말하는 것은, 유다인 아닌 민족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유다교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지만, 반대로 평생토록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살아왔던 유다인 그리스도인들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고 배려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한마디로 유다인과 이방인이 평화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이방인은 형제애를 발휘해 유다인들을 존중하고 배려해 줄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결정은 서신 형식을 통해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지역교회 공동체에 전달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사도회의를 통해서 초대교회는 이스라엘과 유다교를 넘어서서 모든 민족의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제 유다인이나 어떤 특정 민족의 교회가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의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시대 이후에 교부들은 보편적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카톨리코스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참다운 그리스도의 교회는 가톨릭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가톨릭 교회는 하나인 교회이고 일치된 교회입니다. 레오 14세 교황님의 말씀대로, 교회는 그리스도와 사람들을 이어주는 다리이고,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을 이어주는 다리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요 일치되어 있다는 것은 모두가 다 똑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결정이 보여주듯, 서로 다르지만 존중하고 배려함으로써 하나가 되고 일치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서로 존중하고 배려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하나인 가톨릭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면서, 오늘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새 계명

구약성경 전체를 꿰뚫는 핵심적인 말은 계약입니다. “구약이라는 말 자체가 옛 계약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계약의 핵심은 시나이 산에서 이루어진 모세와 하느님 사이의 계약입니다. 아브라함과 노아의 계약은 모세의 계약을 향하고 있고, 모세 이후의 계약은 실상 모세의 계약을 갱신하는 것이었습니다. 계약은 핵심은,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주님이 되어 주시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이 계약의 증표이자 계약을 실현하는 계명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을 지킴으로써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됩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녀들이 잠자리에 들면, 부모가 그 곁에 다가가서 첫번째 계명, 신명기에 나오는 말로 자녀의 귓속에 속삭여 줍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야훼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신명 6,4).

신약은 새로운 계약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맺어지는 새로운 계약을 위한 제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죽음 하루 전,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포도주를 들고 당신의 피, 당신의 죽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려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린 피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백성이 지킬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하느님이 주신 십계명의 근본 정신이 되고, 십계명을 요약하는 새로운 계명, 바로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그것도 예수님의 사랑처럼 죽기까지 사랑하면,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됩니다.

이제 사랑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고 삶의 방식이고 마지막 목표가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힘듭니다. 또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쉽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사랑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랑이 뭔지,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묵상하면, 결국 바오로 사도의 사랑의 송가에 도달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사랑에 대해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시지만, 지금 당장 우리가 노력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 세 가지에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첫째로, 사랑은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참고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큰 결과를 낳는지를 깨닫곤 합니다. 사랑의 시작은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은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뽐내고, 교만하고 자기 이익을 추구해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중심의 생활로 사랑하는 능력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말은 사랑이라고 하면서, 자기 이익과 만족을 위한 경우도 많습니다. 조금 더 나 중심에서 이웃 중심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능력은 내 노력만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새로운 계명, 사랑의 새계명을 묵상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 한가지를 우리 마음 속에 품고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도록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로마 시간으로 지난 수요일 오후에 새로운 교황님이 선출되었습니다. 교황님은 로마와 전 세계에 보내는 첫 강복에 앞서 하신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가 되었듯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고 주님의 교회는 인간과 인간을 잇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전임 교황님의 말씀 그리스도인은 벽을 쌓으면 안되고 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대한 응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큰 기쁨으로 새로운 최고 목자의 탄생을 지켜보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이 인간적으로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새 교황을 뽑는 추기경 회의 콘클라베는 후보 없이 추기경 2/3의 표를 모아 나가는 과정입니다. 후보로 나서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기 앞에 거대한 사명의 파도가 자신을 압도할 때, 그가 한 개별 인간으로서 느끼는 무게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운명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운명. 그리스도교는 이 운명과도 같은 일을 부르심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아주 특별한 부르심입니다. 피하거나 도망가기 힘든 부르심, 거역할 수 없는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를 거룩한 부르심, “성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보통 성소라고 말할 때, 하느님께서 사제와 수도자의 삶으로 불러 주시는 것을 성소라고 말합니다. 전 세계 교회는 오늘 부활 제4주일을 성소주일로 지냅니다. 성소주일에 교회는 더 많은 젊은이들이 사제와 수도자로 하느님의 불림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우리가 성소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한 인간을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으로 불러주신 것과 같은 아주 특별한 성소도 있지만, 하느님은 우리 삶의 일상 가운데에서 우리를 부르신다는 점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결단과 결정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한 일이 많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결단과 결정의 배후에 있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고, 우리의 다양한 삶의 방식, 사제로서의 삶, 수도자로서의 삶, 그리고 혼인의 삶 역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르심에는 하느님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신앙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하나 더 우리가 묵상해야 할 것은, 부르심 또는 성소라는 말은 자신의 일과 직업에도 연관되어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 역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고, 우리가 하는 일 역시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과 직업이 먹고 살기 위해서 또 돈 벌기 위해서 하는 부분도 있지만,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일이 어떻게 하느님의 일을 이루는데 협력하는지 우리가 함께 묵상해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삶, 우리의 신앙, 우리 삶의 방식, 우리가 하는 일 모두의 근원에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실상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불리워졌고, 우리 삶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 삶의 근원에 있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오늘 성소주일에, 내 삶의 근원에서 울려 퍼지는 주님의 목소리, 주님의 부르심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주님의 부활 대축일 이후의 미사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마리아 막달레나가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다음으로 주님의 사도들이, 그리고 사도들이 주님을 만난 사실을 믿지 않았던 토마스도 그분을 만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티베리아스 호수가에서 일곱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일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 역시, 엠마로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고, 그 이후에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그들의 공통된 체험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된 체험을 묵상해보면, 우리 역시 그들과 비슷한 사건과 체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랬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그랬으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일곱명의 사도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들의 곁에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로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쉽사리 깨닫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또는 어떤 느낌과 체험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고, 내 삶에 동반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내 일상 가운데 나와 함께 계셨음을 깨닫게 되면, 예수님께서 나의 인생을 더 풍요롭고 가치있게 변화시켜 주셨다는 것 역시 깨닫게 됩니다. 내가 넘어졌을 때 일으켜 주셨고, 내가 슬플 때 위로해 주셨으며, 내 삶이 헝틀어졌을 때 나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중에서야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어부였던 제자들이 더 많은 물고기를 잡도록, 그리고 새로운 삶의 길을 시작하도록 해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들의 일상 안에서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롭고 새로워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두번째로, 제자들이 가장 뚜렷하게 예수님을 알아본 때는 바로 빵을 나눌 때였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도 그랬고,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은 아침 식사를 할 때 가장 뚜렷하게 예수님을 만납니다. 제자들은 빵을 떼어 나누면서, 성목요일 밤 빵을 나누어 주시던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제자들의 이 만남과 체험은 성체성사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깨닫게 해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체성사 안에 가장 뚜렷하게 현존해 계십니다. 그렇다면,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그리고 어떤 노력으로 성체성사에 임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을 보면 식사를 마치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나를 사랑하는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리고나서 나를 따라라하고 명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을 만난 제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로 초대하시고, 새로운 사명으로 불러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으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사명으로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우리가 알아보든 알아보지 못하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 여정에 동반하시고 우리의 길을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망설이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가치 있게 만들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더욱 기쁜 마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따라 나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물

오늘은 원래 부활 제2주일이지만, 우리 교구 모든 본당에서는 교황님의 추모 미사로 봉헌합니다.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삶과 가르침을 묵상하고 또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마침 지난 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독서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다가, 태어날 때부터 불구자인 사람을 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말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이 말을 마치고 베드로 사도가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가 벌떡 일어나게 되었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사도행전의 이 구절과 관련하여 교회 안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중세에 가톨릭 교회가 승리와 번영을 누리고 있을 때, 어느 교황님이 자신의 고백 신부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불구자를 일으키는데, 왜 자신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데도 불구자를 일으켜 세울 수 없는지를 물었습니다. 고백 신부가 대답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금도 은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베드로의 후계자는 금도 있고 은도 있고 권력도 있지요.”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야말로 사도행전의 베드로 사도와 같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금과 은의 힘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신 분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베드로 광장에 모여든 신자들에게 강복하기 전에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먼저 청했습니다. 그분은 이기고 설득하기 위해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정치 지도자와 만날 때도 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하지 않았고, 어떤 종교 지도자들과 대화할 때도 종교적 교리를 놓고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을 대변했습니다.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우리가 지구의 모든 피조물과 형제자매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촉구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하고, 상처입은 모든 사람을 위한 야전병원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분의 겸손이야말로 참다운 권위였고, 그분의 듣는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외침이 되고, 그분의 가난이 우리를 풍요롭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프란치스코 교황을 좋아하고 지지한 것은 아닙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교황님은 미국 정부와 이태리 정부와 상당한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이민과 난민 문제 때문입니다. 교황님은 지속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배제하는 정부를 비판해 왔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의 입장은 너무나 분명하게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2016년 우리나라에 오셨을 때, 계속 세월호 뺏지를 달고 계시자 옆의 누군가가 정치적인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뺏지를 빼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이렇게 교황님은 금과 은이나 또 다른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시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관점에서 교회를 이끄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도 직무 역시 역사의 한페이지가 되었습니다.

교황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닙니다. 교황의 죽음 이후는 교회의 방향을 정하는 절차가 시작됩니다. “콘클라베라고 부르는 이 절차를 통해서, 새로운 교황이 선출됩니다. 새로 선출되는 교황 역시 개인이 아닙니다. 그를 통해서 교회가 세상 안에서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이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말할 것인지가 결정됩니다.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추모미사를 봉헌하며,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하느님의 크신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그리고 교회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마리아 말하여라 무엇을 보았는지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 전날, 다시 말해, 금요일에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다행히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라는 사람에 의해 예수님은 무덤에 묻힐 수 있었습니다. 토요일, 유다인들의 축제이자 안식일에는 율법에 의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둠이 다 걷히지 않은 시간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의 무덤을 찾습니다. 그리고 무덤이 비어 있음을 깨닫고 베드로와 요한 사도에게 알립니다. 사도들이 주님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했지만 주님의 부활을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다음 구절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맨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그리고 사도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십니다. 주님을 보고서야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온전히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리아가 부활의 첫 증인 될 수 있었는지, 도대체 그녀가 보고 느끼며 깨닫게 된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부속가>에서도 말합니다. “마리아 말하여라 무엇을 보았는지.” 오늘 마리아 막달레나의 시선으로 우리도 주님의 빈 무덤 속으로 들어가 보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른 아침 주님의 무덤을 찾아옵니다. 안식일 율법이 해제되는 가장 빠른 시간에 마리아는 주님의 무덤을 찾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무덤을 찾아와 무덤 곁에 머물면서 주님의 고통과 죽음에 동참합니다. 주님의 고통과 죽음의 가장 밑바닥까지 동참했던 이 여인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가장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과 죽음을 체험한 이에게 부활은 현실이 됩니다. 자기 인생의 무덤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본 이들에게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통에 참여할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우리의 고통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둘째로, 오늘 복음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하고 전합니다.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가고 무덤을 지키며 무덤을 대면할 수 있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우리 각자의 무덤을 찾아가고 그 무덤 끝까지 들어가며, 자기 무덤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무덤의 돌이 치워져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내 인생을 가로막던 돌, 나를 억압하던 돌, 나를 무덤에서 나오지 못하게 막았던 그 돌을 치워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용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을 찾아간 시간은 이른 아침,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러하고 제자들 역시 주님의 부활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부활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고, 우리 인생의 참다운 의미도 온전히 깨달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온전히 날이 밝으면, 온전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면, 주님의 부활도 우리 인생의 의미도 온전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상처 앞에 머무르며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새롭게 이해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머무르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부활로 우리 역시 우리 상처와 아픔을 딛고 우리의 무덤을 열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비추어 주시고 용기를 주시기를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우리 삶의 파스카

탈출기 12장을 보면,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에 대한 규정이 나옵니다. 유다인들은 봄이 시작되는 때에 맞춰 새해를 시작하고, 새해 첫 달을 닛산 달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닛산 달의 열 나흘째에 파스카 축제를 시작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달력으로 계산하면, 닛산 달은 춘분에 시작합니다. 춘분이 지나고 첫 보름이 되면 파스카 축제가 시작됩니다. 올해 춘분이 3 20일이었고, 춘분이 지나고 첫 보름이 바로 지난 주 토요일 4 12, 음력으로 3 15일입니다. 바로 우리가 지난 토요일 밤부터 보낸 한주간, 성주간이 바로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 기간입니다.

파스카라는 말은 원래 건너가다, 넘어가다는 뜻입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탈출한 사건에서 유래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노예살이에서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게 해 주신 사건,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 넘어간 사건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것이 바로 이 축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느님이 이집트에 죽음의 재앙을 내리셨을 때,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명에 따라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자기 집 문설주에 발라, 죽음의 재앙이 자신들을 건너가고 넘어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영도로 이집트를 탈출하고, 어린양의 피로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파스카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파스카 축제 기간에 맞추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축제 기간 내 목요일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셨습니다. 이 만찬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이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도록 했던 어린양의 죽음과도 같은 것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더불어 당신 백성 역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것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파스카 기간의 금요일, 성전에서 어린양을 죽여 봉헌하는 그 시간, 오후 3시에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죽음을 넘어 하느님의 생명으로 넘어가도록 스스로 피를 쏟으신 파스카 어린양이시며, 당신 스스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로 건너가신 파스카 자체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두번째 파스카입니다.

오늘밤 우리는 죽음의 재앙이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건너갔던 그 밤, 주님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던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빛의 예식을 통해서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갑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들으며 그 밤 속으로 들어갑니다. 하느님이 우주 만물과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하느님이 어떻게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는지, 하느님이 어떻게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당신 백성을 돌보시는지, 그리고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영을 당신의 영으로 채워주시는지 읽었습니다. 오늘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들으면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하여 오늘밤은 세번째 파스카의 밤, 우리들의 파스카입니다.

오늘밤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우리의 삶이 이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넘어서 희망과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 안에 부활이 숨어 있었듯이, 우리의 고통과 슬픔 속에 우리의 부활이 숨어있음을 믿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오늘에 절망하지 않고 미래를 희망합니다. 바로 오늘밤에 우리의 삶이 주님의 평화로,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오늘밤이야말로 우리들의 파스카 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요한 복음에서는 여러 차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릅니다. 요한 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하고 소개합니다. 이 말 자체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린양희생양을 의미합니다. 희생양이란 공동체가 어떤 위기 상황을 맞이했을 때, 책임을 대신 지는 사람이나 대상을 뜻합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희생양은 공동체 전제의 집단적인 회개와 속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 1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속죄의 날에 염소 두 마리를 잡아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공동체의 죄를 뒤집어 씌워서 광야로 내쫓았습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은 유대인과 동성애자를 박해함으로써 자신들의 전쟁과 민족적 우월성을 정당화하고자 했고, 일제 제국주의는 관동대지진의 책임을 조선인들에게 몰아서 자신들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희생양은 공동체가 소수의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인간 내면에는 소수의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존속하고자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요한 복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부른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희생양과 같은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수난기에서도 대사제 카야파의 말이 언급됩니다. 카야파는 유다인들에게 백성을 위해서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충고했습니다. 백성 전체를 위해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희생양의 죽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어린양파스카 어린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탈출하기 전, 죽음의 재앙이 이집트 전역을 덮칩니다. 죽음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은 흠 없는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자기집 문설주에 바릅니다. 어린양의 죽음,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고,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게 합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파스카 축제 때 속죄제물로 바치는 어린양을 잡는 시간에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십니다.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할 파스카 어린양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이 말은 첫째로 예수님은 희생양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모두의 죄 때문에, 모두의 죄를 뒤집어쓰고, 모두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희생양이십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파스카의 어린양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님 죽음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대속의 죽음이요, 우리의 생명을 위한 죽음, 우리를 위한 죽음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죽음을 함께 묵상하며,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식을 정성껏 봉헌합시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네 복음서 모두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실상 복음서들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과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최후 만찬은 예수님께서 체포되기 직전에 제자들과의 마지막 시간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최후 만찬이야말로 예수님 삶과 사명의 핵심이자 종합이며,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유산이자 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2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통해 당신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 주십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최후 만찬의 의미, 다시 말해서 당신이 우리에게 남겨 주신 성체성사의 의미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헌신과 봉사의 모습으로 보여주십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 최후 만찬 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제2독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서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시고, 포도주 잔을 들어 당신 죽음의 피라고, 그리고 최후의 만찬이 바로 당신 피로 맺는 새 계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단어는 바로 계약입니다. 사실 성경의 이름도 계약의 책입니다. 구약은 옛 계약을 뜻하고, 신약은 새 계약을 뜻합니다. 계약은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의 관계를 드러내 주는 단어입니다. 이 계약은 탈출기 24장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과 모세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입니다. 그리고 이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서 소를 잡아서 하느님께 바치고, 그 피의 절반은 제단에 뿌리고 나머지 절반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백성에게 뿌립니다. 이 계약을 통해,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돌보아 주시는 주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야훼를 섬기는 하느님 백성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계약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배반하여 우상을 섬기기도 했고, 하느님 보다는 세속의 기회를 쫓아 살았습니다. 실상 인간의 죄 때문에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은 파기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끝까지 계약에 충실한 분이시고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고 새로운 계약을 맺도록 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계약의 제물이 되고 계약의 증거가 되고자 했습니다. 소를 잡아 그 피를 제단과 백성에게 뿌리듯이, 예수님 스스로 당신 피를 하느님의 제단에 그리고 백성에게 나누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최후 만찬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시어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고, 당신의 피를 쏟아서 하느님과 백성이 새로운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 최후의 만찬을 영원히 거행하여,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화해와 결합을 잊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과 백성이 맺는 새로운 계약이며, 그 계약을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영원히 기억하고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 직전의 예수님이 우리에게 남겨 주신 유산이며 유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유산과 유언을 매일 매일 미사 안에서 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 만찬 미사의 의미와 정신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밤 우리는 당신의 몸과 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주시는 첫번째 성 목요일 밤의 만찬 속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첫번째 성 목요일 밤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실 때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합니다. 오늘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주님의 마지막 일주일

예수님의 일생은 기껏해야 30년 남짓 됩니다. 그러나 그 30여년 세월의 대부분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활동하신 1년 남짓, 요한복음에 의하면 길어야 3년 남짓한 기간에 있었던 일 뿐입니다. 더구나 네 복음서 모두 예수님의 죽음 직전의 2-3일의 일들을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실상 복음서가 우리에게 가장 전하고 싶었던 내용은 바로 이 2-3일에 일어난 일들이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증언들이며, 오늘부터 우리가 그 여정을 따라 걷게 될 첫번째 성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가장 큰 축제인 파스카 축제에 맞추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이 축제는 일주일 동안 진행되는데, 맨 마지막 토요일 안식일을 마치면 끝납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에 파스카 식사를 합니다. 이 식사 때에 이집트 노예생활과 광야 생활을 되새기며 누룩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목요일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식사를 합니다. 이 식사 중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지는 새로운 계약이며, 이 파스카 식사가 바로 당신의 죽음을 기억하고 부활을 준비하는 식사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번째 성목요일의 주님의 만찬을 우리는 성목요일 밤 주님 만찬 미사로 재현합니다.

파스카 식사가 끝난 후 예수님은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 중에 유다 최고의회의 병사들에게 체포되십니다. 최고의회로 끌려가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판결을 받았지만, 유다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금요일 새벽에 로마 총독에게 예수님을 끌고 갑니다. 예수님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자처했다는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파스카 축제를 위한 어린양을 잡는 시간인 오후 세시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우리는 성금요일 오후 세시에 주님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을 것이고, 성금요일 저녁에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수난예식을 거행합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 당일인 토요일은 안식일이기에 아무도 무덤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토요일이 끝난 후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서 사도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지만 예수님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그날부터 예수님께서는 여인들과 사도들에게 계속해서 나타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생명으로 부활하셨음을 보여주시고, 사도들에게 이 사실을 세상에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토요일밤 우리는 주님부활 파스카 성야미사를 봉헌합니다. 유다인들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첫번째 파스카,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신 두번째 파스카를 기억하며, 우리 역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우리들의 파스카를 기도할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죽음을 눈 앞에 둔 주님의 마지막 일주일의 여정을 함께 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명의 절정의 여정이 오늘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에 동반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고,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성체성사와 부활의 신앙을 다시 새롭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여정의 시작,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심을 묵상하며, 오늘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옵니다.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대로라면 돌을 던져 죽여야 하는데, 예수님의 생각은 어떠한 지 묻습니다. 바리사이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였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죄와 율법, 구체적인 한 죄인에 대한 태도 등 여러 관점과 태도들이 얽혀 있습니다.

먼저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단순히 율법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을 죽이지 말라고 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이 여인을 죽이라고 한다면 그동안 예수님이 보여준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가 거짓이 되어 버립니다. 바리사이 사람들이 이 여인을 끌고 온 진짜 이유는 율법을 어긴 이 여인을 벌하고, 이 여인의 비윤리적 행위를 단죄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진짜 의도는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욕망을 단죄함으로써 자신들의 숨겨진 의도와 욕망을 채우고자 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성찰해 봐야 할 점은, 바리사이들의 이러한 숨겨진 의도는 우리들의 마음 안에서도 그리고 우리들의 사회와 역사 안에서도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과 소수 민족, 동성애자, 집시들에 대한 사회적인 혐오를 조장하였고, 그들을 학살했습니다. 특정한 이웃을 지나치게 미워하거나, 이웃을 배제시키고자 하거나, 이웃을 지나치게 모욕하고 혐오하는 마음 속에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마음이 숨어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우리 자신들은 바리사이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숨은 욕망은 우리의 숨겨진 욕망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맞서,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웃에 대한 미움과 혐오의 마음이 우리에게 없는지 우리 자신과 대면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이웃에 대해 쉽게 판단하고 단죄할 수 있는 존재인지 우리 스스로에게 묻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이 많은 사람부터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하듯이,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웃을 손쉽게 판단하고 단죄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죄 지은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이 여인에 대한 태도가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닌 마음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죄를 단죄하거나 이 여인의 죄의 크기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인의 미래를 신뢰해주시고, 새로운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이웃을 미워하고 혐오하는 마음 속에는 우리 자신의 더 큰 욕망이 숨어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실상 이웃을 단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우리가 이웃을 단죄하지 않을 때, 주님 역시 우리를 단죄하지 않고 우리의 새로운 미래를 믿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용서와 화해,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우리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자비로운 아버지

오늘 복음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바로 자비로운 아버지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 자신의 몫을 챙겨서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몫이 바닥이 나자,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고,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자 염치불구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전혀 탓하지 않았고, 오히려 잃었던 아들을 되찾았다고 여기며 큰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그러나 아버지 곁에 있었던 큰아들은 동생도 못마땅했지만, 그 동생을 너무나 기쁘게 맞이해주시는 아버지도 못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동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고 하시며 함께 기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어떤 신학자나 철학자보다도 더 명확하게, 어떤 설교나 강의보다도 더 감동적으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자비가 얼마나 넓고도 크신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작은아들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지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 가운데 자기 몫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탕진하고 나서야 제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입고 있는 모든 옷을 벗고 나서야,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고 나서야 초라한 자기 모습을 발견합니다. 인간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기 죽음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나서야, 자기 모습을 되돌아보고, 아버지를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고 매달립니다.

큰아들의 모습 역시 또 다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큰아들이 화가 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큰아들의 화는 아버지를 향해 쏟아부어 집니다. 그는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동생보다 아버지께 더 많이 인정받고 더 많이 사랑받고자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재산 가운데 자기 몫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에 대해서는 자기 몫을 요구한 셈입니다. 시기와 질투, 더 많은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 역시 큰아들의 마음을 흐리게 만듭니다. 큰아들은 언제나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실상은 작은아들처럼 아버지를 향해 가는 길을 잃어버린 셈입니다.

두 아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아버지께로 향하는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두 아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우리의 모습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고, 두 아들 모두를 아버지의 잔치로 데려옵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이 잔치에 함께 하여 즐기고 기뻐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방식대로 이 잔치에 참여하기를 언제나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얼굴을 다시 되돌아 보고, 동시에 분노에 더디시고 자비와 사랑이 충만하신 아버지의 마음에 의탁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하느님의 이름

오늘 제1독서 탈출기 3장의 말씀은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고통에서 울부짖는 이스라엘을 이끌어 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하느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만난 이 체험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원초적인 하느님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모세의 하느님 체험과 그 분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은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여 계속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기억을 되새기도록 합니다. 오늘 특별히 하느님의 이름 야훼와 그 의미에 대해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당신 이름을 계시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나는 있는 나다입니다. 더 단순하게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느님의 이름은 나는 나다입니다. 이 이름의 첫번째 의미는 하느님은 스스로 존재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로부터 존재하며, 주변의 다른 존재의 도움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둘째로, 하느님은 그냥 그분일 뿐, 어떤 인간의 말과 생각도 그분을 규정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존재와 사유 너머에 계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당신이 말하시는 그대로 그냥 입니다. 이 말이 히브리말로 바로 야훼입니다. ‘야훼라는 말뜻이 그냥 나는 나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당신 이름을, 하느님이 당신 자신이 야훼라고 밝혀 주신 부분이 구약성경에서 세 차례 등장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좀 더 묵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자신들에 입에 올리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이름을 말해야 할 때, 야훼 대신에 히브리어 아도나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도나이나의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도 진한 고딕체 글짜로 주님이라고 쓰여진 부분이 바로 아도나이, 나의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오로지 야훼 하느님께만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은 바로 야훼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에게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바로 야훼 하느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깊게 체험하면,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체험 하나는 예수님이 어두운 밤에 풍랑이 이는 호수가를 걸어오신 사건입니다. 마태오 복음 14장을 보면,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겁에 질려 유령이다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마치도 모세 앞에서 당신을 드러내시듯이,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다나는 곧 있는 나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하고 외칩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못 자국을 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던 토마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고 말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하느님과 같은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동시에 예수님 역시 하느님과 같으신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기도 중에 변모

네 개의 복음서 모두가 한결같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자주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기도하십니다. 그분은 당신 삶의 중요한 순간들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십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십니다. 그분은 당신 아버지께 기도하기 위해 늘 조용한 장소로 피해 가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기도하시는 분이시고, 기도에 있어서도 우리의 스승이십니다.

기도하시는 주님을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가장 먼저 묵상해 볼 점은, 주님께서는 당신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도 기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스러운 십자가 위에서도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기도하면서 극복했습니다. 주님의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어떤 고통과 역경 앞에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가슴이 찢어질 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힘과 용기를 주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겐 기도야말로 힘이자 용기입니다. 우리 역시 고통과 시련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안에서 주님께서는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중요한 결정을 하기 위해 기도하시고, 기도하시기 위해서 조용한 장소를 찾으십니다. 신앙인 역시 중요한 결정 앞에서 기도하고, 기도하기 위해 세상의 시끄러움에서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에 마음을 많이 쓰고 있고, 지나치게 TV나 인터넷에 시간을 많이 보냅니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세상의 시끄러움에서 한발 물러서야 합니다. 온갖 소음을 피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산에 올라 기도하실 때,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옷이 하얗게 빛났으며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하느님은 예수님의 참된 모습, 원래의 모습이 드러나도록 해 주셨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깊은 기도 안에서 자신의 참된 모습, 하느님이 주신 원래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당신께 사랑받는 존재인지,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변모가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사순시기의 두 번째 주간을 맞습니다. 이 사순시기 동안 좀 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기 내면에 머무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줄여야 합니다. 이 사순시기 동안에라도 시간을 정해서 규칙적으로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야 말로 우리의 힘이자 용기입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의 참다운 모습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산에 올라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순시기는 우리 스스로 광야로 나가고 산으로 올라가 주님을 만나고, 자기 자신을 만나는 은총이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번잡한 일상 가운데에서도 우리 스스로 기도하기를 결심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유혹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기에 앞서, 성령이 이끌려 광야로 들어가십니다. 그곳에서 사십일을 기도하며 지냈는데, 그 기간 중에 악마에게 유혹을 받습니다. 빵의 유혹, 권세와 영광에 대한 유혹, 그리고 인정받고 능력과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예수님이 광야에서만 받았던 것이 아니라, 당신 삶 전체 안에서 이루어진 유혹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안에서도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첫째로 빵의 유혹입니다.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유혹입니다. 빵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기본 조건이지만, 그것만으로 우리가 참으로 인간으로서 살아가거나 그것만으로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로, 악마는 예수님께 악마 자신을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이 유혹 역시 예수님의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빵의 기적 이후에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떠받들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을 피해서 그들에게서 거리를 둡니다. 공간적으로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시고, 시간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는 하느님께 기도하심으로써 그 유혹을 피해 가십니다. 이 유혹은 오늘 우리에게도 결코 만만치 않은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조금만 타협하면, 잠시만 눈을 감으면 물질적 이익이 손에 들어올 것 같은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 기회가 바로 예수님이 겪으신 유혹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악마는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지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천사들이 보호할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이 역시 예수님의 삶 가운데, 특별히 당신 수난 중에 되풀이되는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달리셨을 때(마태오 27, 39-), 지나가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곧이어 율법학자와 수석 사제들도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예수님은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지지 않았고 십자가 위에서도 내려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삶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인정받고자 하고, 또 그것들을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이웃과 관계를 맺을 때도 이웃과 더불어 어떤 일을 할 때도,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우리의 생각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인정받고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깊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유혹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유혹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은, 인간의 불안하고도 온전하지 못한 조건 그리고 인간의 존재 깊이 숨겨진 욕망을 깨달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자신이 유혹받고 있음을 깊이 깨닫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삶의 전환을 이룰 수 있는 바탕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약하고 불완전하며 욕망을 감추고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 삶의 한가운데서 다가오는 많은 유혹을 이겨내고 새로운 삶의 전환을 이루도록 노력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유혹을 깨달을수록, 우리가 예수님과 더불어 광야에 서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순시기야말로 우리 삶의 전환을 이룰 기회이고, 우리 삶의 광야입니다.

오늘 내가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자주 넘어가는 유혹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그리고 그 유혹에 맞서 싸울 힘을 주시도록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Nex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