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5일 토요일 성모신심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사흘 뒷날인 12월 28일은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이다. 오늘 4월 성모신심미사 복음은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사건의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복음은 군주제 국가라면, 왕 혹은 군주의 폭정을 폭로하는 이야기로 읽힐 수 있고, 공화정 국가라면 독재자에 의한 국가폭력에 대한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고통과 관련된 문제는 참으로 대답하기 곤란한 것들이 많다.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고통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답게 가꾸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면 고통은 못된 사람들, 나쁜 짓 하는 사람들, 잘못 사는 사람들에게 내려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통은 오히려 선한 사람들, 약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이 쏟아지는 것 같다. 좋은 마음, 선한 의지로 세상을 살려는 사람들이 고통을 더 당하지 나쁜 놈들은 가만 보면 하는 것 마다 더 잘 되는 것만 같아 보인다. 그래서 더욱더 하늘의 무심함을 원망하기도 한다. 도대체 하늘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가? 하고 하늘에 삿대질과 온갖 입에 담기도 힘든 욕들을 퍼부어 대기도 한다.
함부로 말하기가 참으로 힘들지만, 당장은 답을 줄 수 없으나 세월이 필요한 일이 고통에 대한 의미부여의 작업이 아닐까 싶다. 시간이 지나면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가치가 바로 고통, 그 중에서도 무고한 고통, 억울한 고통, 야속한 고통이다. 아무 죄 없는 아이들의 죽음, 이 아이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예수 때문에 죽어야 했던 첫 번째 순교자들이었다. 그리고 이 무죄한 죽음이 지니는 의미는 바로 이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안긴 당사자 예수 자신이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비로소 드러난다. 한마디로 그 아이들의 죽음은 예수의 미래를 보여주는 예시적인 상징이다.
예수님이 오지 않았다면 이 아이들은 죽지 아니하였을 것 아닌가? 질문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이 아기들을 죽인 것은 아니다. 아기들을 죽인 것은 사람이다. 인간의 탐욕 때문이고, 인간의 권력욕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간 600만명의 사람들에 대하여 과연 하느님은 무엇을 하셨냐고 따지고 하느님께, 교회에, 그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들에게 대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에서 무수한 이들을 참혹하게 학살한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사람의 광기였고 사람의 탐욕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 것이었다.
하느님은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다. 하느님은 아우슈비츠에서 인간 탐욕의 제물이 되셔서, 권력욕의 제물이 되셔서 그곳에서 죽으셨다. 이것이 하느님의 방식이다. 고통을 함께 나누어지시는 분, 그래서 기어이 아우슈비츠의 상처와 아픔을 낫게 하시고, 그 아픔을 위로하시는 분이시다.
지난해 12월 3일부터 어제 4월 4일까지 참으로 지난한 시간들을 우리는 보냈다. 계엄성 수면부족, 계엄성 불면증, 계엄 증후군에 시달렸다.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냐고, 하느님이 너무하시지 않냐고. 사람에게 너무 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이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죄하게 죽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사람이 죽이고 있고 다만 사람이 그것을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서 만나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숱한 고통들, 터무니없는 억울함들, 그 일들 가운데는 분명,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의 것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에서 하느님의 눈물을 읽어 내고,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읽어 내며, 하느님은 진리와 정의의 하느님임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 신앙인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요한 복음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요한 9,2)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오. 우리는 해가 있는 동안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합니다.”(요한 9,3)
아프다고 하는 이에게 왜 아프냐고 묻는 것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보다 더 못난 일이다. 어디가 아프냐, 얼마나 아프냐고 묻는 것이 사람냄새 나고 따스함이 묻어나는 방식이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분명 하느님의 뜻이 있을 거라고, 결코 하느님은 이렇게 내버려 두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 힘을 내어 보자고,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성심껏 돕겠다고 아픈 이를 위로하고, 아픈 이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 그리고 불의에 저항하며, 정의를 외치는 것, 이것이 우리들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오늘 4월 첫 토요일 성모신심미사의 복음은 나에게 이렇게 다가온다.
여러분에게 오늘 복음은 어떻게 다가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