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뉴스
매체명 부산일보 
게재 일자 2015-11-07 (13면) 

[종교인칼럼 '빛'] 묻지 마라, 숙명이다

인도에 가면 어마어마한 숫자의 자전거'릭샤꾼'들이 있습니다. 온종일 힘겹게 페달을 밟아야만 먹고 사는 깡마른 아버지들. 겨우 2달러도 되지 않는 돈을 벌지만, 처자식을 생각하면 죽을 수 없습니다. 숙명처럼 오늘도 자전거 하나에 의지해 땡볕 길을 나섭니다.
 
아프리카콩고 강에는'타이거 피쉬'라는 물고기를 낚는 어부들이 있습니다. 마치 상어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이 물고기는 사납기 그지없지만 폭포처럼 쏟아 내리는 강에 맨몸으로 온종일 물질을 하는 어부들 또한 아버지들입니다. 거친 물살에 떠내려가 죽은 이들도 부지기지만 콩고 강의 어부들은 오늘도 길을 나섭니다. 쉽게 죽을 수 없습니다. 자식들 때문입니다.  

광부들, 어부들, 막노동의 아버지들. 자식을 위해서라면 이보다도 더한 것도 하겠다는 그들의 험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을 '행복하냐?' 묻는다면 잔인하지만, 답은 똑같습니다. 자식들 때문이고 가족들 덕분입니다.  

당신 때문에 죽겠다. 하지만, 사실 그런 당신 덕분에 오늘까지 산 것입니다. 이 병 때문에 죽겠습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병 덕분에 오늘까지 산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 병을 앓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 행복했을까요? 

아닙니다. 아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나는 당신의 아들과 딸로,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살겠습니다. 

그러니, 자꾸만 행복하냐? 묻지 마십시오. 이미 우리는 저마다의 숙명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서서 눈물을 꺼내기도 하고 웃음을 꺼내기도 합니다. 함부로 취급되지 말아야 할 것들.

눈물 흘린다고 불행한 것만도 아니고, 웃는다고 행복한 것만도 아닙니다. 나를 지탱하는 이 숙명을 포기하지 않는 것. 

행복하든 행복하지 않든, 결국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오늘도 온종일 가마솥 앞에서 국밥을 말아내는 시장통의 아주머니에게서도 산다는 일의 묵직함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세월의 퀭한 모짊마저도 툭 털고 일어서던 숱한 아버지의 바지 끝자락. 비린내 반질거리던 어머니의 '몸빼'에서도. 숙명만큼 질긴 숨줄이, 그래도 살만했었다며 얼굴을 훔칩니다.

그저 살아만 이어주는 것. 그마저도 참 고맙고 감사한 이곳, 병원.

그래서 병원에 있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행복하냐? 묻지 않습니다. 숙명이다! 일어섭니다.


 
조영만 신부 
 
울산과 독일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에서 사목했고, 현재 부산 메리놀병원 행정부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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