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은 성 세형라우렌시오, 성녀 효주아녜스, 성 광렬요한, 성녀 효임골롬바 ,성녀 매임데레사 축일입니다.
우리 양정성당에는 베드로회의 박석동(세형라우렌시오), 지혜로우신 동정녀pr. 공경란(효주아녜스), 김민자(효임골롬바), 정화자(매임데레사),
권영선(아기안나)님이 있습니다축하드립니다.



 성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Laurent Joseph Marius Imbert) 주교의 세례명은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이며,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이다. 그는 1796년 3월 23일 프랑스 남부 엑스(Aix) 교구의 마리냔(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앵베르가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카브리에(Cabries)의 라보리(Labori)로 이사하였고, 앵베르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집안은 가난하였지만 그 자신은 총명할뿐더러 기도나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묵주 만드는 법을 배워 공부를 하는 한편, 나이 많은 부친의 생활에도 보탬을 주었다고 한다.

   그가 마음속에 동방의 포교지방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엑스의 대신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그래서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로 옮겨가 공부한 후, 1819년 12월 18일에 성품성사를 받고 곧 중국의 사천(四川)으로 파견되었다. 앵베르 신부는 12년 이상 사천에 머물렀다. 그는 중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혔으며, 모든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던 중 1836년에 조선의 제1대 교구장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주교가 사망하자 곧 주교품을 받고 조선의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 해 12월 17일 중국 대륙을 건너 몽고의 서만자(西灣子)에 머물고 있던 그는 마침 조선 사신의 수행원으로 동행한 교우 조신철, 정하상 등의 협력을 얻어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의 교우들은 처음으로 주교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실로 조선 교회가 설립된 지 53년만의 일이었다.

   3개월 동안 조선말을 배운 앵베르 주교는 고백을 듣고서 성사를 줄 수가 있었다. 그는 이미 조선에 와 있던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와 함께 지방을 순회하기도 하고,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는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교회는 오랜 재난을 겪은 후 주교를 맞으면서 재생하기 시작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스러운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항상 허약하고 병든 몸으로 매우 바쁜 생활을 하였지만, 한편으로 그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삼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 무한히 괴로운 것은 박해로 말미암아 신입교우들의 신앙이 끊임없이 위협을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드디어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었다. 곳곳에서 교우들이 체포되자 앵베르 주교는 박해가 퍼지기 전보다 더 많은 교우에게 성사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교우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러는 동안 사태는 점점 위태롭게 되어갔고, 배교자들의 자백으로 3명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배교자 김여상은 관헌들과 짜고 주교를 유인하려고 하였으며, 주교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스스로 자수의 길을 택하고, 다른 두 신부들도 주교의 권고를 받아들여 즉시 관청에 자수하도록 하였다. 포청의 옥중에서 세 선교사는 서로 만날 수 있었다. 주교는 여러 번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며 두 신부들과 함께 옥중의 고초를 이겨냈다. 조선 정부는 그들이 절대로 배교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마침내 대역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에 처하도록 판결을 내리고, 처형 장소는 한강변의 새남터로 결정하였다.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세 선교사들은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군사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벗긴 다음 손을 앞가슴으로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 한 군사가 장대 위에 기를 올리고 또 다른 군사는 사형 선고문을 읽고 나서 수형자들을 무릎 꿇린 다음 열 명 가량의 병정이 달려들어 칼질을 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잃게 되었다. 앵베르 주교는 1839년 9월 21일에 순교하였으며,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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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녀 김효주 아녜스는 서울 근교 밤섬이란 마을의 어느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어머니는 6남매의 자녀와 함께 입교하여 열심한 신자생활을 하였다. 아녜스는 성교회에 입교한지 오래지 않아 벌써 탁월한 모범을 보이더니, 언니 콜룸바(Columba)와 동생 클라라와 함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바쳐 동정을 지키기로 서약하고 아름다운 덕을 쌓았다. 이들 자매는 모친을 잃은 뒤에는 서울에서 20리가량 떨어진 용머리 마을의 오빠 집에서 살고 있었다.

   기해년(1839년) 5월 3일 포졸들이 서울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있는 김 안토니우스(Antonius)의 집을 포위했으나, 그들이 올 것을 눈치 챈 안토니우스는 가족을 데리고 피신한 후였고, 그의 집에는 효주 아녜스와 효임 콜룸바 그리고 세 살 된 어린아이만 남아 있다가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포장은 효주 아녜스 자매를 어르기도 하고 별별 약속을 다하며 배교시키려 하였으나 얻은 것은 거절뿐이었다. 이에 포장은 혹독한 형벌을 가했으니 효주 아녜스는 9월 3일에 순교한 6명의 신자 중에서 가장 악독하고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다른 신자들은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러 포졸들과 관원들이 분통을 터트리기도 하였지만, 효주 아녜스는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침묵 속에서 기도를 드리며 마음속으로 우리 구세주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포장은 이와 같이 훌륭한 항구심이 어떤 마력의 힘 때문이라 생각하여 등에 몇 가지 주문을 쓰게 하고, 불에 시뻘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그 글자들을 열세 군데나 뚫게 하였지만, 이러한 형벌에도 그녀는 전혀 고통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후 포졸들은 효주 아녜스를 끄집어내어 학춤형을 가하며 온갖 비웃음과 욕설을 퍼부었지만, 효주 아녜스는 용기를 내어 그 괴로움을 달게 참으며 굳게 마음을 가졌고, 더욱더 열심히 자기의 고통을 주님께 바치며 묵묵히 참아 받았다. 이러한 형벌을 가한 후, 포장은 옷을 벗긴 채로 그녀를 죄수들의 감방에 들여보내 갖은 욕을 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동정녀들의 천상배필이 그녀를 구원하러 오셔서 초인적인 힘을 넣어주어 한 사람이 남자 열 사람을 능가할 만큼 힘을 강하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이들은 어떤 신비스러운 힘에 눌려 마침내는 옷을 돌려주고 그녀를 여자 감방으로 데려갔다.

   5월 9일 효주 아녜스는 언니인 효임 콜룸바와 함께 형조로 이송되었고, 5월 12일에는 형조판서 앞에 출두해서 그동안 감옥에서 당한 여자로서의 모욕을 호소하자, 형조판서는 이 같은 처사를 저지른 포장과 포졸들을 처벌하였다. 그 다음부터 여교우들은 악형보다도 더 괴로운 그와 같은 모욕은 당하지 않게 되었다. 그 후 효주 아녜스는 언니 효임 콜룸바보다 먼저 순교의 칼을 받고 순교하니, 때는 1839년 9월 3일이요 나이는 24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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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녀 김효임 콜룸바(또는 골룸바)는 서울 가까운 밤섬이라는 마을에 사는 부유한 어느 외인 부모한테서 태어났다. 효임은 6남매 중 둘째였던 것 같고, 넷째가 효주 아녜스, 다섯째가 클라라이다. 이 셋은 동정을 지켰다. 효임은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와 같은 때에 입교하였고, 이때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들에게 결혼을 권해 마지않았고 그때마다 그들은 거절하였으며, 결국 결혼한 여자로 보이기 위해 머리를 말아 올려 쪽지게 하였다. 동정을 허원한 두 자매는 서울에서 30리가량 떨어진 오빠 김 안토니우스(Antonius)의 집에서 살았다. 이때 그녀는 계명을 충실히 지키고, 일주일에 두 번 대재를 지키며 남을 권면하고 애긍도 많이 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모든 교우들이 그들을 칭찬하며 그들의 덕행과 아름다운 표양에 경외를 표하였다.


   기해년(1839년) 5월 3일에 김사문이란 자가 효임의 집을 돈 많은 교우집이라고 고발하였다. 이때 가족들은 모두 피신해버리고, 콜룸바 자매와 어린아이 한 명이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좌포청에 갇혔다. 효임은 보통 여자보다 겁이 많아 어떤 교우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들으면 얼굴이 창백해졌으나, 자신이 체포되어 끌려갈 때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효임이 동생 효주와 함께 포장 앞에 끌려 나가자 포장은 물었다.

   “너희는 어찌하여 혼인을 아니 하였느냐?” “우리의 마음과 몸을 정결하게 보존하고 천지, 신인, 만물을 창조하신 천주님을 섬기고 흠숭하여 우리의 영혼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동정의 신분과 의미를 명백히 밝힌 것은 효임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때까지는 모두 이 대답을 피하거나 다른 구실을 댔었다. “너희들은 인륜을 파괴하는 일이요, 나라에서 엄금하는 일을 감히 한단 말이냐? 천주를 배반하고 너희 책이 어디 있는지 말하고, 동교인을 대라. 그리고 너희 오라비가 어디로 갔는지도 말해라.” “만 번 죽어도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고 우리 오라비로 말씀하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효임은 배교할 수 없고 또 교우들을 고발하지 못하며, 교리책을 바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효임이 주리를 틀리고 뾰족한 몽둥이로 찔렸으나 조금도 굴하는 빛이 없는 것을 보고 포장은 “더 세게 찔러라.” 하고 형리들을 다그쳤다. 그러나 효임은 태연자약하게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더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다시 옥으로 끌려들어간 효임 자매는 옷을 벗기고 매를 몹시 맞는 등 모욕을 당하였다. 효임은 붉게 단 숯불로 열두 번이나 지지는 형벌을 당하였으나 4, 5일이 지나자 효임은 기운을 다시 차리고 덴 자리도 씻은 듯이 가시었다. 이를 지켜 본 형리들은 이상히 여기며 효임에게 귀신이 접한 줄로 생각하여 부적을 써서 그녀의 어깨에 붙이기도 하였다. 이윽고 형리들은 자매의 옷을 벗겨 도둑감방으로 몰아넣고 모욕을 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영혼들의 천상정배가 오시어 그들에게 초인적인 힘을 내려주셔서 한 사람이 능히 열 남자를 당해낼 만큼 힘을 주시어 이 역경을 이기게 하셨다.

   “너희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니 그것이 참말이냐?” 하고 묻는 포장에게 효임은 답하였다. “관장께서 말씀하시는 제사는 헛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옥에 갇혀있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들은 생일이나 무슨 명절을 당하여 아무리 자식들이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청한다 할지라도 자기들 마음대로 옥에서 나가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하물며 지옥에 있는 자들이 어떻게 거기서 나와 제사에 참례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 그것은 헛되고 거짓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효임은 조심성 있고 재간 있는 말로 재판관들을 놀라게 하였다.

   문초가 끝날 무렵에 효임은 자기와 동생이 당한 모욕의 사실을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나서 아래와 같이 덧붙여 말하였다. “서민의 딸이건 양반의 딸이건 우리는 존중함을 받을 권리가 있지 않사옵니까? 나라 법에 의해 우리를 죽이신다면 즐겨 죽겠사옵니다. 그러나 법에도 없는 그런 모욕을 당한다는 것은 너무나 마음 아픈 일이옵니다.” 이러한 내용의 진상을 듣자 재판장은 그녀의 언변에 감동하여, 법 이외의 형벌을 가한 자들을 꾸짖고 그들 중에서 두 사람은 귀양을 보냈다. 그 후 효임은 다시 법정에 끌려 나가 세 차례나 곤장을 맞았으나, 흔들리거나 용기가 줄어드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1839년 9월 26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칼을 받고 동정으로 순교하니 그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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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이매임 테레사(Teresia, 또는 데레사)는 어느 양반 집에서 태어났고, 순교자인 이영희 막달레나(Magdalena)와 이정희 바르바라(Barbara)의 고모이다. 외인 시절에 결혼한 이매임은 스무 살에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왔을 때, 같은 동리의 한 여교우로부터 성교회를 알고 입교하였다. 이때부터 집안 식구들에게도 열심히 전교하였다. 그래서 이영희 막달레나의 어머니가 우선 입교하였고, 또한 어머니는 딸들을 입교시키게 되었다. 이매임은 판공성사 때가 되면 올케 허계임과 함께 상경하여 성사를 보곤 하였다.

   기해년에 들어서면서 박해가 크게 일어났는데, 이 때 남명혁, 이광헌 등의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그러자 함께 모였던 김성임, 김 루치아(Lucia), 허 막달레나, 이 막달레나, 이 바르바라 등 6명은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로 하고 자수를 결정하였다. 그래서 4월 11일에 그들은 자수하였으나 포졸들은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포장은 기가 막혀서 이와 같이 물었다. “너희들은 천주교 도리가 옳은 것이라고 믿느냐?” “물론입니다. 만약 거기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의심을 가졌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배교하고 천주교 책을 바쳐라.” “차라리 죽을지언정 배교를 못하겠습니다.” 여기서 주리 트는 형벌을 4차례를 당하여도 굴복하지 않자 그들을 포청으로 보냈다.

   5일 후 포장이 다시 불러내어 “너희들이 당한 형벌과 옥중의 무서움이 너희들의 혼미함을 깨우치지 못하였을까?” “저희들더러 배교하라고 권하시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시는 것뿐입니다. 저희들이 자수를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인데 그를 배반하라고 하신단 말씀입니까? 아니올시다. 참된 교우는 천주를 위하여 살고 천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나라법이 저희들을 사형에 처한다면 즐겨 죽겠습니다. 그러니 저희 교를 배반한다는 것은 절대로 안 될 말입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1839년 7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치명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52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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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박아기 안나_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소장.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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